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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 동화에서 현실로, ‘그 시절’ 페미니즘 입문서의 영리한 재해석[미디어비평] 톺아보기
미디어평론가 이정희 | 승인 2020.02.17 10:31

[미디어스=이정희] 초등학교 시절 나의 '최애' 동화는 <작은 아씨들>이었다. 다 알고 읽으면서도 매번, 현실 앞에서 좌절하는 조와 그런 조와 엇갈리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소년 로리와 에이미, 그리고 가난한 동반자 프리드리히의 이야기들이 새로운 감동과 전율로 어린 시절의 나를 사로잡았다. 도대체 <작은 아씨들>의 그 무엇이 1970년대 대한민국의 어린 꼬마 여자아이를 매료시켰을까? 그 늦은 해답을 한 편의 영화로 찾아온 <작은 아씨들>에서 찾아보았다. 

주체적인 삶을 꿈꾸던 마치 가의 네 자매

영화 <작은 아씨들> 스틸 이미지

영화 속 시대적 배경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0년대의 미국이다. 남북전쟁에 투철한 신념을 가졌던 아버지 마치 씨는 전쟁에 참전했고, 전쟁에 대한 진보적인 입장만큼이나 사회적으로 열린 분이었던 부모의 영향 아래 마치 가의 네 자매 메그(엠마 왓슨 분), 조(시얼샤 로넌 분), 베스(엘리자 스캔런 분), 에이미(플로렌스 퓨 분)는 그 시대 또래 소녀들과 다른 주체적인 자기 삶의 미래를 꿈꾸며 자라난다. 

그렇다면 당시 또래 소녀들이 살아가야 할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시대 또 다른 여성의 삶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 분)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말괄량이 아가씨, 얌전한 옷차림으로 무도회에 나가서 남자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그중 누군가에게 낙점을 받아 아내의 자리를 얻어내는 것. 그 시대 여성들의 성공한 삶이란 좋은 배필을 만나 성공적인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 좋은 배필이란 말에 담긴 뜻은 인성이 좋은 사람이라거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연애의 대상이 아니라, 그녀에게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줄 수 있는 남자와 그의 가문이다. 

<작은 아씨들> 속 네 자매가 살아가는 시대도 마찬가지다. 손에 시커멓게 잉크 자국을 묻히고 자신의 글을 팔기 위해 출판사에 간 조가 글쓴이가 ‘여성’인 자신이라 차마 밝힐 수 없었고, 뻔히 조가 글쓴이인 줄 알면서도 편집장은 그걸 모른 척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대고모님의 도움으로 메그가, 에이미가 사교계라는 ‘시장’에 자신들을 내어놓고 선택의 기회를 얻어 가난한 처지에서 신분상승을 하고자 애쓴다. 에이미의 말처럼, 그것이 스스로 돈을 벌 수 없는 처지의 당시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성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답정너'와 같은 삶의 방향이 정해진 시대에 마치 가의 네 자매는 저마다 자기 삶의 방향을 개척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동화 속, 조금은 로맨틱한 이야기를 1860년대라는 시대로 끄집어내어 현실의 색채를 더한다. 

조와 에이미, 다르고도 같은 선택 

영화 <작은 아씨들> 스틸 이미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길들지 않은 야생마 같은 스칼렛이 있다면, <작은 아씨들>을 작은 아씨들답게 만드는 이야기의 중심에는 선머슴 같다는 조가 있다. 아버지 병구완하러 떠나는 어머니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머리를 자를 수 있는 따뜻한 용기를 가진 든든한 딸. 늘 가난에 시달리고 여성이라는 한계에 봉착하면서도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에 대한 의지를 놓치지 않는 주체적 여성. 그리고 늘 그 누구보다 아파하고 애틋해하고 애써 품어주려 하는 품 넓은 감수성까지. 소설 <작은 아씨들>은 제목은 작은 아씨들이지만, 시대에 어깃장을 놓고 자기 삶을 모색하려 애쓰는 ‘조’라는 한 여성의 성공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화 역시 언니인 메그 역의 엠마 왓슨보다도 더 언니 같은 무게감을 지닌 배우 시얼샤 로넌을 통해 조라는 인간적이면서도 주체적인 여성상을 실감 나게 구현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욕망은 첫사랑 애슐리를 거쳐 레트를 통해 끊임없는 좌절을 겪는다. 영화 그리고 소설의 대미는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모두가 떠나고 비로소 그녀는 아버지의 농장, 거목 앞에 당당히 홀로 서게 된다. 사랑을 통해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스칼렛이라는 인물의 '주체적 자아'가 비로소 시인되는 순간이다.

영화 <작은 아씨들> 스틸 이미지

조의 성장 역시 사랑을 통해 표현된다. 소설 속 조와 로리의 풋사랑과 이별이 통과의례 같았다면, 영화로 온 조와 로리의 관계는 조금 더 현실적인 규정을 더한다. 마치 가에게는, 그중에서도 특히 조에게는 키다리 아저씨와도 같았던 소년 로리, 하지만 조는 분명하게 말한다. 부모님을 잃고 할아버지의 후광 아래 사교계의 도련님으로 일상을 보내는 로리와, 작가가 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조는 결코 '동반자'로 행복해질 수 없다고. 소설 속 한없이 조에게 너그러웠고 넉넉했던 소년 로리는, 티모시 살라메가 분한 로리를 통해 보다 나른하면서도 모성애를 불러일으키는 부잣집 한량으로 구현되어 조가 내린 이성적 판단의 경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그런 로리와 동반자가 된 건 영화 내내 조와 자매 내에서 애증의 관계에 놓였던 에이미다. 어쩌면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동일하게 '주체적인 여성'으로 그려진 조라는 캐릭터가 차별성이 그리 크지 않았다면, 영화 <작은 아씨들>의 색채를 한층 분명하게 한 건 에이미란 캐릭터일지 모른다. 일찍이 <레이디 맥베스>와 박찬욱 감독의 미니 시리즈 <리틀 드러머 걸>을 통해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 바 있는 플로렌스 퓨가 분한 에이미. 소설 속 에이미가 단순한 성장 캐릭터였다면, 그레타 거윅 감독은 '그 시대 여성의 욕망'이란 정의를 보다 주체적으로 해석해 낸다. 

늘 자신이 '욕망'하는 바에 의지가 뚜렷했던 에이미. 하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은 에이미는 그런 그녀의 욕구가 자신의 가난한 가정에서,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서 무기력한 욕망임을 알고 좌절한다. 그래도 적극적으로 대고모님을 통해 그림 공부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지만, 파리에서의 경험으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이 탁월하지 않음을 시인하고,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의 길에 자신을 던진다.

영화 <작은 아씨들> 스틸 이미지

로리라는 인물에 대해 조가 자신의 이상과 동반자적 대상이 될 수 없어 '포기'를 했다면, 에이미는 보다 적극적으로 로리의 삶에 대해 개입하며 또 다른 동반자적 관계를 설정해 간다. 그저 파리에서 외로워 로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 에이미가 아니라, 방황하는 로리를 잡아줄 수 있는 '소울메이트'로서의 '성숙한 관계'로 에이미의 사랑은 재해석된다.

마치 가의 네 자매는 대고모님의 한탄처럼(물론 그런 대고모님 역시 결혼을 하지 않았다)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결혼 제도의 풍습을 빗겨 갔다. 하지만 영화 속 엔딩에 앞서 출판사 편집자와 조가 '딜'하는 장면에서처럼, 소설도 영화도 편의적인 선택일 수는 있지만 '로맨틱'한 해피 엔딩에 방점을 찍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마치가 네 자매의 해피엔딩은,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의 관례를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살아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여지를 남긴다. 1860년대로 치자면 '판타지적'인 획기적인 결말이다. 

아마도 1970년대 한국 사회의 '어린 소녀'는 역시나 당시 여성들이 살아가야 하는 관례적인 삶에 막연하게나마 막막함을 느꼈었나 보다. 그때 역시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서 결혼 잘하는 게 여성이 누리는 최고의 행복이라는 고정관념이 지배하는 사회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어린 소녀에게 <작은 아씨들> 속 조는 투사 같았고, 그런 조가 결국은 자신의 꿈도 이루고 사랑마저 얻었다는 해피 엔딩은 굉장한 위로와 대안처럼 여겨졌을 듯하다.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는 시대였고, 당연히 그런 걸 알 리도 없는 나이였다. 그럼에도 어린 소녀에게는, 결혼도 마다하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향해 매진하는 동화 속 주체적인 주인공의 이야기가 처음 만나는 '페미니즘' 입문서 같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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