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디어스] 이 영화는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다. 에우리디케는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름만 보고 그녀를 쉬이 떠올릴 사람은 드물 거다. 우리에게는 그녀의 이름보다 그의 남편의 이름이 익숙하다. 저승의 신 플루토까지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신기의 하프 연주로 죽은 아내를 살릴 기회를 얻지만 이승에 도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해 영원한 이별을 겪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의 남편이다.

본인의 이름보다 남편의 행동이 먼저 떠오르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 에우리디케는 수동적 인물이다. 겁탈당할 위기에 처해 도망치다가 뱀에 물려 한 번 죽고, 오르페우스가 뒤돌아보며 두 번 죽는다. 반복되는 죽음에 그녀의 책임은 없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변신>에서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는 장면을 묘사할 때 괄호까지 치며 수동성을 강조한다. (하긴 그녀로서는 사랑받은 것 말고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죽음을 불평할 권리마저 빼앗긴 인물이 에우리디케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 이미지

에우리디케의 숙명을 타고난 여인

귀족의 딸 엘로이즈(아델)는 에우리디케의 숙명을 타고났다. 얼굴도 본 적 없고 심지어 죽은 언니의 상대자였던 남자와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한다. 황당한 결혼의 정점을 찍는 매개체는 초상화다. 초상화에 담긴 엘로이즈의 미모가 합격판정을 받아야 결혼이 성사된다.

혼인을 시키려 애쓰는 어머니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결혼에서 도망치고 싶은 엘로이즈는 초상화 모델로 나설 생각이 없다. 몰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 마리안느가 산책친구로 위장한 채 섬에 있는 저택으로 초대된다. 에우리디케를 살리기 위해 저승의 뱃사공 케론의 조각배를 타고 스틱스 강을 건넌 오르페우스처럼.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와 처음 산책하던 날. 한동안 집에만 갇혀있던 엘로이즈는 집에서 나오자 갑자기 절벽을 향해 질주한다. 마리안느는 그녀를 잡기 위해 뒤따라 달린다. 낭떠러지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춘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보며 말한다.

“늘 이걸 꿈꿔왔어요.”
“뭘요? 죽는 거요?”
“달리는 거요.”

일주일 남짓한 시간 동안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마리안느는 고군분투한다. 꿈꾸던 달리기를 하듯 몸과 마음이 멀찍이 앞서가는 엘로이즈를 뒤쫓으며 몰래 그녀의 부분 부분을 관찰하고 밤마다 기억을 더듬으며 결국 초상화를 그려낸다. 산책을 하며 친분을 쌓고 서서히 거리를 좁히는 두 사람.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고 완성된 초상화를 공개한다.

초상화는 아름답다. 두 뺨에는 홍조가 돌고 옅은 미소와 함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모습이 담겼다. 엘로이즈는 자신과 닮았냐 묻는다. 마리안느도 닮지 않았음을 안다. 결혼에 대해 말할 때 엘로이즈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고 입꼬리가 내려왔으며 두 손은 갈 길을 잃었으니까. 초상화에는 규칙과 관습, 이념이 있다며 애써 둘러대지만 생기와 존재감은 없느냐는 대꾸에 결국 할 말을 잃고 얼굴을 지워버린 채 떠나려 한다. 그 순간 엘로이즈가 모델이 되겠다고 나선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 이미지

당신이 나를 볼 때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잠시 출타하며 마리안느에게 주어진 시간은 닷새. 마리안느는 스스로 포즈를 취한 엘로이즈를 마주한다. 서로를 응시하는 둘.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지 마리안느는 화가로 다져온 관찰력을 다소 과시하듯 평소 엘로이즈의 습관을 읊는다.

"당신은 당황스러울 때 입술을 깨물죠. 화가 날 때는 눈을 깜박이지 않고요"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곁으로 부른 뒤 예상했다는 듯 반격한다.

"당신은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으면 이마를 만지고, 평정심을 잃으면 눈썹이 올라가요. 당황하면 입으로 숨을 쉬죠”

이마를 만지고 눈썹이 올라간 채 입으로 숨을 쉬는 마리안느가 묻는다. 어떻게 그걸 알았죠. 화가와 동등한 입장이 된 엘로이즈는 대답한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인 세 여인은 오르페우스 신화를 읽고 열띤 토론을 펼친다. 하녀 소피는 이승을 코 앞에 두고 아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려 뒤를 돌아보는 오르페우스를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멍청한 오르페우스, 거기서 왜 돌아봐? 무슨 이유로? 말이 안 돼. 참아야지"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 편에 선다.

"그는 사랑하는 그녀를 선택하기보다는 그녀와의 추억을 선택한 거야. 연인이 아닌 시인(예술가)으로서의 선택을 한 거야"

그리고 엘로이즈는 앞의 두 사람과는 전혀 다른 시각의 해석을 한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 이미지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

주어진 닷새의 마지막 밤. 마리안느는 전처럼 초상화의 얼굴을 지워버리려 한다.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엘로이즈와 영원히 이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엘로이즈도 이를 안다. 하지만 후회하지 말고 기억하라며 마리안느를 시인으로 만든다. 둘은 가장 사랑스럽고 은밀한 모습을 각자에게 선물로 남기며 아침을 맞이한다.

다음 날 초상화를 어머니에게 전달한 뒤 억지로 울음을 참고 도망치듯 저택을 빠져나가려는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가 외친다. 뒤를 돌아보라고. 오르페우스 행동에 대한 엘로이즈의 해석은 이랬다.

"에우리디케가 '뒤를 돌아봐요'라고 말했을 수도 있어“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미술품 경매장에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 신화를 출품한다. 그 그림에는 어째서인지 뒤에서 들리는 아내의 목소리에 대답하려는 듯한 오르페우스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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