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수현 기자] 조선·동아일보가 자사 창간 100년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이를 두고 김종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은 “조선·동아 100년은 친일·반민족의 역사”라면서 “기자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언론·사회 시민단체는 조선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폐간’을 요구하고 있다.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민주언론시민연합·자유언론실천재단·전국언론노동조합이 주축인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청산 시민행동’은 1인시위, 대중강연, 삼보일배 등의 행사를 기획, 진행하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적폐 언론 청산’을 올해 주요 사업으로 선정하고 조선·동아 100년 공동대응을 선언했다.

미디어스는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을 만나 조선·동아 100년을 되짚었다. 김종철 위원장은 동아투위 사건 당시 해직된 기자다. 해직 이후 한겨레 신문 창간에 참여했으며, 연합뉴스 대표이사를 지냈다. 아래는 김종철 위원장과의 일문일답이다.

김종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 (사진=미디어스)

- 곧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100년이다

조선·동아 창간 100년 이전에 역사적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했을 때는 일본 제국주의가 극심했을 때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진 후 일본은 당황했다. 총독부의 무단통치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끼고 문화통치를 시작했을 때다. 조선·동아 창간 배경에는 3.1운동에 있다. 3.1운동이 없었으면 이들의 창간은 없었을 것이다.

이후 조선·동아는 민족을 배신했다. 조선·동아는 일제가 번성할 때 ‘천황폐하 만세’ 기조로 나아갔다. 이승만 자유당 독재 시절 조선일보는 물에 술 탄 신문이었다. 동아일보는 인촌 김성수가 야당으로 변신한 후 야당지의 기질이 있었지만 박정희 독재정권이 들어선 후 침묵했다. 특히 동아일보는 국민주를 표방해 창간했는데, 김성수 일가는 국민주를 사들이거나 잠식해 개인 신문사로 만들었다. 조선·동아 100년에는 아픈 역사가 있다.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사람들이 이러한 역사를 알아야 한다.

- 100년을 맞이해 조선·동아 시민행동에서도 투쟁 수위를 높여야 할 것 같다

현재 전국언론노동조합과 여러 시민단체가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동아투위 역시 독자적으로 활동할 계획이다

- 조선·동아를 변화시킬 해결책은 무엇이라 보는가

폐간이다. 조선·동아가 수미일관하게 주장하는 것은 반공과 친미다. 과거에는 그랬다 하더라도, 남북 평화공존 분위기에선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를 해야 한다. 그런데 두 신문은 ‘흘러간 노래’를 계속 불러대고 있다. 기득권 체제가 무너지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 최근 조선·동아투위 선배들이 삼보일배하고, 광화문 1인시위를 하고 있다

다들 건강이 좋지는 않은데 힘들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75년 강제해직 이후 온갖 일을 다 겪었는데 그 정도로 힘들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박정희 유신정권과 맞섰다는 자부심도 있고 보람도 있다. 자부심과 보람은 지금 투쟁의 동력이 된다.

1인시위를 하면 젊은 사람들은 신기한 듯 쳐다본다. 역사를 모르니까. 동아일보 기자들은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동아투위가 뭔지는 알 건데, 그게 자신들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거다. ‘시험 보고 들어갔는데 우리가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후배들에게 특별한 걸 요구할 순 없다. 다만 자신들이 다니고 있는 조선·동아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부끄러워 했으면 좋겠다. ‘조선·동아가 어쩔 수 없이 그랬겠지’라고 생각하기보다 진실을 알아야 한다. 또 조선·동아 기자들이 소수자를 위한 기사를 작성하길 기대한다. 젊은 기자들이 정론을 펼치고 농민·여성·노동자·장애인의 편에 서길 바란다.

지난해 9월 1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조선·동아 시민행동 발족 기자회견 (사진=미디어스)

- 조선·동아가 권력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재 한국적 상황에서 조선·동아는 영원한 것처럼 보인다. 조선·동아를 폐간하지는 움직임이 있지만 세력이 강하지 않다. 젊은 세대는 신문을 많이 보지 않으니 ‘조선·동아가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동아는 기사와 사설을 통해 기득권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영향력은 젊은 세대에까지 미칠 수 있다. 한겨레·경향신문 등 좋은 신문사가 있지만 조선·동아와 비교했을 때 사세가 약할 수밖에 없다. 조선·동아를 즐겨보는 기성세대는 보수적이다. 보수적 기성세대는 상대적으로 경제적 지위가 높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동아의 영향력은 강할 수밖에 없다.

- 동아일보는 언제 입사했나

67년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대학생에게도 입사 자격을 줬다. 동아일보에 입사한 후 학군단에 들어갔고, 70년 다시 복귀했다. 수습 기간을 마치고 사회부·편집부에서 근무하다가 74년 동아투위 사건을 맞이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이 극심했을 때다. 긴급조치, 민청학련 사건에서 동아일보는 한 마디도 못 했다. 비판 기사를 쓰면 남산에서 고문당하던 때다. 신문사 중 최고라는 동아일보에서 그러하니, 기자들은 자포자기 상태였다. 기자들은 신문이 나오면 당구장에 가 있다가 저녁때 소주나 마시던 때였다.

기자들은 ‘우리가 이렇게 할 순 없다’며 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바로 비판 기사를 쓴 건 아니다. 조금씩 여러 사건을 알리며 자유 언론을 되찾고 있었다. 특히 동아일보는 당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자유 언론 실천선언을 했다. 박정희 정권이 놀랐을 것이다. 자유 언론도 모자라 노동조합을 만들었으니까. 결국 3월 17일 새벽 폭도들이 편집국을 난입해 직원들을 내쫓았다. 능력이 있는 직원 대다수가 회사 밖으로 내쫓기니 사세는 기울 수밖에 없다. 당시 1등 신문이었던 동아일보는 현재 조선·중앙에까지 밀리고 있다. 동아투위 사건 이후 보잘것없는 매체가 됐다.

동아투위 사건 때 해직된 기자는 113명이다. 막막했다. 블랙리스트가 있어서 이들은 취업도 제대로 못 했다. 난 상업광고 회사에 3개월 다니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번역, 문화평론에 매진했다. 이후 한겨레 창간에 참여했다. 동아투위 사건이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믿음에 따라 회사를 나갔기 때문이다. 생활고에 시달리고 불안하긴 했지만 다들 잘 극복했다.

동아일보 강제 해직사건 당시 동아일보·동아방송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이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에서 종로5가 기독교회관까지 행진을 벌이고 있다. (사진=동아투위)

- 조선·동아 사주는 조선·동아투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동아투위에서 여러 번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사과는 전혀 없는 상태다. 국가·동아일보를 상대로 부당해고 소송도 했다. 그런데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현재는 10·24 기념식에 대한 소송을 생각하고 있다. 동아투위 사건 4년 뒤인 1978년 10월 해직 기자들은 제도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 사건을 정리한 ‘민주인권일지’를 발행했다. 그날 안종필 위원장, 홍종민 총무 등 동아투위 10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구속 후 간암에 걸려 생을 달리한 분도 있다. 이 사건에 대해 법적 분쟁을 해보라는 조언이 있어 고민 중이다.

- 자본과 권력에 무릎을 꿇지 않는 언론을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분명하다. 언론사 소유주가 주식을 독점하지 않으면 된다. 언론사 소유주는 자신의 경영권을 이용해 편집권을 가져가게 된다.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해 자본과 편집의 독립을 가져와야 한다. 뉴스타파가 모범적인 사례다. 뉴스타파는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 매체가 다수 나와야 한다. 언론이 참신하고 시민을 위한 기사를 쓴다면 뉴스타파 같은 경영방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 현재 언론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있는가

과거 기자는 독재정권과 싸웠다. 하지만 지금은 권력의 압력에 대항해야 할 시절이 아니다. 이제는 기자가 전문성을 강화하고 독창성을 키워야 한다. 좋은 의미로 독자를 깨우쳐야 한다. 이를 위해선 언론인들이 부지런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와 비교하면 미안하지만, 언론인 급여 수준은 좋아지고 있다. 안락한 만큼 일에 대한 열의를 강화해야 한다. 시대적 흐름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향을 찾는다면 시민들이 호응해줄 것이다. 언론인들의 건투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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