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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면 안돼요[여해, 바다와 같아라]
백종훈 원불교 교무 | 승인 2020.02.03 08:57

[미디어스=백종훈] 오래된 신문을 열었다. 1998년 상반기에 강원도 화천에서 군부대 장병 수백 명이 급성 바이러스성 간염에 속한 A형 간염에 감염됐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이를 언론에 알렸던 대학병원 의사들을 추궁해 비밀이 샌 경로를 캐려했다. 의대교수들은 A형 간염 사태를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려 했으나 정보를 준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포기했다. 그리고 입을 굳게 닫았다. 

육군본부 공보관은 처음에 “A형 간염에 걸린 장병은 43명이고 서울 등의 환자급증과는 무관하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격이다. 당시에 화천군 15사단 승리부대에 근무하며 A형 간염을 앓았던 수많은 장병 중 한 명이 바로 나다. 

전염병이 돌자 부대 내 살림을 챙기던 행정보급관은 막사 옆에 솥을 걸고 식판과 수저를 삶았다. 하급부대 병원인 의무중대에서 간호사 역할을 하는 의무병이 곳곳을 돌며 환자파악에 나섰다. 식욕부진이나 만성피로를 묻고 황달증세가 있는지 살폈다.  

그러나 열악한 최전방부대에서 군사훈련에 더해 가지가지 고된 작업에 동원되어 지친 군인들에게 식욕부진과 만성피로를 묻는 자체가 난센스였다. 내일을 견뎌내려 위장은 뭣이든 잘 소화시켰다. 위생병은 대충 훑어보고 지나갔다.

콜라 빛 오줌을 누던 ‘나’였으나 그것이 A형 간염증상인지도 몰랐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아프다는 말은 꾀병으로 간주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소대 병장 가운데 1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구타 및 가혹 행위로 영창을 다녀올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라 입도 뻥끗 못했다.

집에 알릴 방법도 없었다. 병영 안의 일을 외부로 발설하는 것이 금기시 될뿐더러 백여 명이 사는 중대에 공중전화 1대가 전부라 누구든 통화내용을 엿들을 수 있었다. 편지 역시 언제든 검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대에 헌혈차가 왔다. 오후 사역 열외와 초코파이라는 말에 끌린 병사들이 긴 줄을 섰다. 이후 여러 날 지나 적십자로부터 혈액검사 결과를 받았다. 혈중 간 기능 수치(ALT) 8,000이 나왔다. 그제야 두 돈 반 앰뷸런스를 타고 상급부대 병원으로 갔다.

군의관이 입원시키려 했다. 그렇지만 기존 병실은 이미 A형 간염 환자로 꽉 찼다. 임시로 만든 공간도 발 디딜 틈 없었다. 유행성 간염 환자를 수용하기에는 군 의료시설이 턱 없이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소속부대로 되돌아간 나는 곧바로 격리됐다.

선임병 한 명과 둘이서 한 달을 갇혀 지냈다. 허나 내가 못 나갈 뿐 다른 사병들은 스스럼없이 격리실을 드나들었다. 개구쟁이 고참들이 다가와 같이 그 병 걸려서 나도 좀 쉬어보자며 추근거리는 어처구니없는 나날이었다. 

모두 젊고 건강한 20대 초반인데다 A형 간염이 전염성은 높으나 치사율이 0.1%~0.3%에 불과하고 대개 합병증 없이 회복되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허술한 군 의료 시스템과 군대의 비밀주의 아래서 걷잡을 수 없을 뻔 했다. 결과적으로 운이 좋았다.

2020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저지하는 최전선에 선 질병관리본부의 민첩한 대응능력과 신속한 정보공개를 보며 A형 간염에 대처했던 20세기 말 대한민국 육군의 ‘무능’과 ‘숨기기’와는 차원이 다른 면모를 발견한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한에 거주했거나 방문했던 국민이 아닌, 일본에서 옮아서 한국에서 확진판정 받은 12번 환자나 제주를 다녀간 중국인이 고국에서 확진판정 받은 경우처럼 통제 어려운 루트로 병이 퍼져나간다면 앞으로의 일을 가늠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의료진의 분투와는 별개로 개개인은 잘 먹고 위생에 철저해야 함은 물론 징후가 보이는 대로 방역당국에 신고하는 동시에 대중이 모인 자리를 피해야겠다. 이십여 년 전 나는 아프다고 하면 꾀병이라고 혼날까 두려워 말없이 병을 키웠다. 요행으로 병이 주변에 크게 번지지 않아 다행이지 어리석지 않았다 할 수 없다. 

스스로 알리고 조심한다고 누가 뭐라 할 리 없는 지금, 한 걸음 더 나아진 우리라면 겁에 질려 숨어든 지난날의 ‘나’와 같은 과오가 다시는 없어야겠다. 

한 과객에게 밥을 차려 주었더니 상에서 먹지 아니하고 밥을 싸가지고 외처로 나가서 먹었다. 대종사 그 이유를 물으시었다. 과객이 대답하였다. “제 몸에 무서운 전염병이 들었사오니 제가 지나간 후에 이 대중 중에 좋은 것은 못 남길지언정 몹쓸 병을 남겨 주고 가서야 되겠나이까.” 대종사 들으시고 보물을 얻은 듯이 기뻐하시며 그 사람을 무수히 칭찬하신 후 말씀하시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보이지 아니하는 좋은 보물이 들어 있도다. 그 병은 필시 전생의 남은 과보일 것이요, 그 과보를 다 받고 나면 앞으로는 반드시 진급이 될 사람이다.” 원불교 대종경선외록 11:14

백종훈 원불교 교무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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