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강남규] 故 문중원 기수가 세상을 떠난 지 60일이 넘었다. 지금까지도 유가족들은 그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 설 명절 전에는 장례를 치러주고 싶다는 것이 유가족의 바람이었다. 그 바람이 무색하게 설 지나 어느덧 2월이다.

시민대책위원회의 치열한 투쟁의 결과로 문중원 씨의 이야기와 한국마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다룬 기사들은 많이 나왔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이미 다 공개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마사회는 여태껏 요지부동이다. 그래서 앞선 기사들의 무덤 위에 또 한 편의 글을 얹는다. 여기에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다만 한 사람이라도 새롭게 이 이야기를 알게 되기를 바라며 쓴다.

한국마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는 쓰지 않겠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짚어주는 쉽고 깊은 기사들이 이미 차고 넘치게 많다. 알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할 뿐이다.

문중원 씨의 이야기

고 문중원 기수 진상규명 시민대책위가 22일 청와대 앞에서 책임자 처벌 등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중원, 40세. 2005년 개장한 ‘한국마사회 렛츠런파크 부산경남’에서 15년간 일해온 베테랑 기수. 말하자면 이 경마공원의 창립멤버인 셈이다. 빵을 좋아했지만 기수로서 체중 관리를 위해 절제할 만큼 열심히 임했다. 하지만 한국마사회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경력이나 열정 따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교사(마방 책임자)들은 이따금 기수들에게 부당한 지시를 내렸다. 실력대로 임하지 못하게 하고 말을 살살 타도록 하는 식이다.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면 출전 기회를 안 주는 식으로 보복이 돌아왔다.

문중원 씨는 그것이 억울해 조교사 면허에 도전했다. 사비로 호주, 영국, 일본 연수를 다녀왔다. 온 힘을 다해 공부했다. 마침내 2015년 면허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마방 심사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채점표를 공개해달라는 요구에 한국마사회는 응하지 않았다. 뒤늦게 채점표가 발견됐는데, 그는 합격점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단, 외부 심사위원에게만. 내부 심사위원들은 점수를 잘 주지 않았다. 마방을 받아간 사람들이 고위 간부와 친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조교사 면허 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들이었다.

결국 그는 2019년 11월 29일까지 마방을 받지 못했다. 2019년 11월 29일, 문중원 씨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하루 전인 28일, 그는 자신의 두 아이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문했다. 8살 딸에게는 겨울왕국 화장대 장난감을, 5살 아들에게는 어벤져스 레고 세트를. 그러고는 유서를 썼을 것이다. A4 3장 분량의 유서를 그는 2부 출력해 한 부는 기숙사 자기 방에, 한 부는 친했던 동기의 방문 앞에 놓았다. 한국마사회가 혹시나 유서를 감출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의 유서에는 한국마사회의 부조리함과 불공정함을 고발하는 말들이 낱낱이 적혀 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가 불안해 살 수 없다. 도대체 뭐가 선진 경마일까. 지금까지 죽어나간 사람이 몇 명인데…. 더럽고 치사해서 정말 더는 못하겠다.” 프린터로 출력한 유서의 마지막 장에는 자필로 이렇게 적었다. “이거 내가 쓴 거 맞아요. 혹시나 프린트 한 거라 조작됐다 할까봐.” 죽음을 택하는 순간까지도 그는 투쟁적이고 전략적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진짜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부디 날 아는 사람들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가 자필로 남긴 마지막 문장이다. 죽음을 택하며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빌어주던 사람, 문중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오은주 씨의 이야기

한국마사회의 부조리한 운영을 비판하는 유서를 남긴 채 숨진 고 문중원 기수의 부인 오은주 씨가 17일 오전 경기도 과천시 한국마사회 앞에서 열린 '설 전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시민대책위 오체투지 행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중원 씨의 아내 오은주 씨는 11월 29일 새벽 5시에 문득 잠에서 깼다. 남편이 옆에 없었고, 휴대폰에는 동료들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벼락같은 소식을 듣고 남편의 기숙사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그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힘들어도 다 견뎌낼 수 있는 남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지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유서를 읽으며 오은주 씨는 많이 울었다. 남편의 고통을 그때야 알았다. 장례식장에 앉아 있는데, 한국마사회에서 사과하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은주 씨는 싸우기로 결심했다.

“장례를 치르면 모든 것이 잊혀질 것 같았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6명의 죽음이 잊혀졌듯, 내 남편의 죽음도 그저 억울한 죽음으로 끝날 것 같았다.”(참세상, ‘“남편 죽음을 밝히기 위해, 오늘보다 내일 더 강해질 것”’)

오은주 씨는 렛츠런파크 부산경남 본부장을 찾아갔다. 권한이 없으니 본사에 가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경기도 과천 한국마사회 본사로 찾아갔다. 경찰들이 가로막았다. 경찰은 뚫고 들어가려던 오은주 씨를 바닥에 주저앉히기도 했다. 김낙순 한국마사회장은 유족들을 경찰로 막아놓고는 언론에 “승자독식 구조를 개선한다”고 보도자료를 냈다. 그 다음날인 12월 27일, 유족들은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 서울정부청사 앞에 농성장을 열었다. 장례를 치러줄 수 없었던 문중원 씨의 시신도 운구차에 태워져 농성장으로 옮겨졌다. 지난 1월 27일로 농성은 한 달째를 넘겼다.

두 아이는 부산의 동생 집에 맡기고 올라왔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도 길어진다. 아이들은 편지를 썼다. 아빠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여러 색깔의 색연필로 쓴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아빠, 나랑 키즈카페에서 놀아줘서 고마워. 아빠랑 키즈카페에 갈 수 없어서 슬퍼. 아빠랑 워터파크도 못 가서 슬퍼. 아빠가 보고 싶을 땐 사진을 볼께.” 아이들은 대통령에게도 편지를 썼다. “대통령 할아버지께. 우리 아빠 추워요. 따뜻한 하늘나라로 보내주세요.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요.” 이런 아이들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오은주 씨는 한국마사회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오늘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오은주 씨가 치열하게 싸우기로 결심한 이유는 또 있다. “남편이 그렇게 되고 제가 세상에 나와서 보니까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해고자와 비정규직,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내 자식마저도 어두움밖에 없는 세상에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움직여야 바뀌겠다 싶더라고요.”(한겨레, ““더는 억울한 죽음 없어야”…‘용균 엄마’와 ‘문중원 부인’의 만남”) 문중원 씨가 살아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김용균들’과 ‘문중원들’이 더이상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그들의 소중한 사람들이 슬픔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겨울은 반드시 봄을 데리고 옵니다. 지금 우리는 몸과 마음이 추운 겨울에 머물러 있지만 곧 봄이 올 것입니다. 추운 마음들이 녹고 우리 맘속에 꽃이 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기에 힘들어도 지쳐도 따뜻한 봄을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이 세상이 더럽고 치사해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인생의 마지막 선택을 하지 않도록 세상을 바꾸는 데 보탬이 되겠습니다.” (1월 17일 민주노총 결의대회에서 오은주 씨의 발언 중 인용)

겨울은 반드시 봄을 데리고 온다. 추운 마음들이 녹고 우리 맘속에 꽃이 필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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