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한국은 표현의 자유가 부족한 보수적 사회다"

표현의 자유에 관해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많다. 대중문화의 표현 수위가 낮고, 도덕주의가 강해 외설성을 억압하며, 예술가들의 작품 발표에 가해지는 비난이 심하다는 것이다. 특히 요 몇 년 사이, 문화 콘텐츠를 향한 여론의 비판이 제기되는 일이 잦아졌는데, 이걸 ‘검열’이라 규정하거나 문화의 자유를 탄압하는 ‘전체주의’ 경향이라 성토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생각에 진실이 없지는 않다. 한국은 해방 직후부터 90년대 말 김대중 정권이 집권하기까지 반세기 동안 권위주의 사회였다. 심지어 일제시대에도 총독부는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탄압했다. 참여 정부가 끝난 후에는 신권위주의 정권이 집권해 불과 몇 년 전까지 통치를 이어갔다. 이렇게 권위주의의 백야를 지새운 땅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아무리 넘쳐도 갈증이 날 것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갈증의 반작용으로 오해되고 절대화되는 경향이 있다.

박근혜 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 회원 등이 2017년 1월 1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대응 집단소송 제안 원고모집'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표현의 자유를 주창한 대표적 인물은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이다. 밀은 저 유명한 『자유론』에서 표현의 자유를 지지해야 할 몇 가지 논거를 제시한다.

첫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진리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설령 그 의견이 틀렸다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다. 셋째, 다수 통설이 전적으로 옳다 해도 반대의견으로 검증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편견이 된다. 넷째, 다수 통설이 헛된 독단적 구호로 전락하면 사람들의 행동과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어떤 표현이 여론을 통해 비판될 자유까지 금기시되는 것은 아니다. 밀은 더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했으니, 오히려 그런 상호 비판에는 찬성할 것이다. 밀은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고까지 주장하며 표현의 자유를 지지한다. 하지만 자유가 유보될 수 있는 단 한 가지 상황을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다.

이렇게 볼 때, 단순히 ‘그릇된’ 표현, 다수와 ‘다른’ 주장과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주장은 명백히 다르다. 표현의 형식으로 뱉어졌지만 표현에 머무르지 않는 표현들, 실존 인물의 인격을 공격하거나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공격하는 표현은 과연 표현에 불과한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타인들의 입지를 좁히는 공격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토대를 제약해 도리어 표현의 자유를 한정 지을 수도 있다. 가령, 밀은 사회의 소수파에게 가중되는 표현의 억압에 주목해 “정통 신앙보다 이교도에게 가해지는 공격을 차단하는 것이 훨씬 더 시급하다”라고도 말한다.

문학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공연이든 게임이든, ‘예술’과 ‘문화’의 너울을 쓴 표현이라도 그것이 현실 자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좀 더 넓은 자유를 보장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 현실이 반영돼 있거나 현실을 가리키는 경우엔 검토가 필요하다. 실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정서’와 ‘감각’을 통해 파급되는 양식, 딱딱한 논변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빠르게 파고드는 문화적 포맷이야말로 경우에 따라 좀 더 문제적일 수 있다.

물론 표현을 국가가 사전에 통제하는 것은 국가 기구에 과도한 권력을 쥐어주는 것일 수 있고, 통제의 자의성을 부를 수 있으며, 말 그대로의 검열이 될 수 있다. 때문에 특정한 표현이 형사적으로 규제되는 경우는 신중한 합의 과정과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시민 사회 내에서 논의와 논쟁, 비평과 비판이 진행돼 특정한 표현을 자정하는 기준을 세우는 건 검열, 전체주의와는 다른 개념이다. 그건 표현의 자유에 의한 표현의 견제에 해당한다.

서구에선 몇 세기 전에 자유주의 사상이 입안되었다. 여러 계기와 논쟁을 거치며 표현의 자유가 구현되었다. 권위주의적 단계에서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는 단계를 거쳐, 인권과 평화를 위해 소수자 혐오 표현 등을 국가가 예외적으로 규제하는 등 자유의 경계가 마련되는 단계에 가 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프랑스 당국에 의해 고발당한 건 19세기 중반이고, 미국에서 ‘율리시즈’ 출판 해금 판결이 내려진 건 20세기 초반이었다. 반면 한국에서 ‘즐거운 사라’의 마광수가 구속당한 건 1990년대, 고작 이십 년 전이다. 예술의 외설성이 법의 도마에 오르고 논쟁이 불붙는 등 자유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가 서구에 비해 늦었다. 자유주의를 충분히 누리고 학습할 시간 없이, 세계화와 양극화가 빚어낸 극우화의 파도 속에 시민 사회 내부에서 특정한 표현들이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지 반복적으로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최근 공론장에서 나타나는 표현의 자유에 관한 논쟁과 오해는 이런 배경에 기인하는 바가 있다.

다모임 - 중2병 / [MV] TEASER (염따, 더 콰이엇, 사이먼 도미닉, 팔로알토, 딥플로우)

한국과 달리 서구에선 창작자들이 무슨 표현을 해도 ‘쿨하게’ 접수된다고 환상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가장 강조되는 북미에서도 등급제는 세분화돼 있고, 실존인의 인격이나 소수자의 정체성을 공격하는 표현이 공적으로 수행되면 논쟁이 뒤따르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이 지면에 래퍼 염따가 가사에 한 여성 연예인을 거론한 사실을 비평하는 글을 썼는데, 최근 미국에서도 Fabolous라는 유명 래퍼가 염따의 가사와 흡사한 맥락으로 과거 비욘세를 들먹인 가사를 쓴 것에 관해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한 일이 있었다(리드머, 'Fabolous, 펀치라인 잘못 썼다가 사과한 일화 회상'). 어떤 셀레브리티가 소수자의 인권을 해하는 표현을 뱉었을 때, 출연하던 광고나 협찬받던 스폰서가 끊기는 사례 역시 드물지 않다.

국가의 개입 없이 ‘표현의 자유’로써 표현을 자정하는 건 자유주의가 온전히 정착한 상태에서 이뤄질 수 있는 이상적인 상태다. 다시 말해, 지금 공론장에서 벌어지는 논쟁들은, 당장은 소모적이고 출구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표현의 자유가 발전하기 위해 밟을 수밖에 없는 과정일 수도 있다. 만약 아무런 기준과 필터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무제한으로 쏟는 사회가 있다면, 어떤 이들의 상상과 달리 그런 사회는 제도와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거나, 유무형의 권력을 쥔 다수파들만 표현의 자유를 독점하는 사회일 것이다. 이런 관점을 공유한 채, 표현의 자유를 명분으로 표현에 대한 비판을 거부하지도 말고, 표현을 통해 표현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합리적 비판 기준을 잃지 않는 것, 양자 모두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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