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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의 전설’- 나인틴 헌드레드 88개 건반의 삶, 그 처연한 겸손과 최선[미디어비평] 톺아보기
미디어평론가 이정희 | 승인 2020.01.27 12:38

[미디어스=이정희] 영화를 본 후, 친구 맥스가 그토록 애타게 나인틴 헌드레드를 부르고 설득했음에도 그가 내린 최후의 결정이 충격적이라 좀처럼 거기서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좀 흐르니 그 충격적 결말조차도 그의 일관된 삶에 어울리는 마침표가 아닐까란 반문을 해보게 된다. 과연 우리는 주어진 ‘삶의 건반’에 여한이 남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역설적으로 2020년을 살아가며 이 사람 나인틴 헌드레드를 삶의 지표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지니아 호의 나인틴 헌드레드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스틸 이미지

나인틴 헌드레드, 1900년은 미국이라는 신대륙에 가슴이 부풀어 대서양을 건너는 사람들의 시대였다.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 우아하고 멋들어진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건, 배 밑창에 겹치듯 다닥다닥 붙어 앉아 그 시간을 견뎌냈던 허름하고 추레한 그들이건 모두가 '아메리카'란 그 외침에 눈을 빛내며 달려가던 시절, 그들이 탔던 배 버지니아 호에 아메리카로 함께 가지 못한 채 남겨진 바구니 속 아기가 있었다. 

배의 제일 밑바닥에서 배가 어서 빨리 아메리카에 닿도록 쉼 없이 석탄을 퍼부어 넣던 석탄부 대니에게 발견된 아이는, 그가 발견된 박스와 연도의 이름을 따 대니 부드맨 T.D 레몬 나인틴 헌드레드가 되었다. 탄부들의 숙소에 매달린 바구니, 아버지가 된 대니의 옷으로 대신한 기저귀에 대니가 즐겨보는 경마 신문이 글읽기 교재가 되며 자라났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인틴 헌드레드는 배가 항구에 정착해 모두가 배를 떠났을 때에도 존재하지 않는 아이로 배에 남겨져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잠든 모두를 뒤흔들어 깨운 꼬마의 피아노 연주. 그렇게 기적처럼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알린 나인틴 헌드레드는 그날부터 버지니아 호의 피아노 연주자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그런 기적은 버지니아 호를 떠나지 않는 피아노 연주자의 전설이 되어 여전히 아메리카로 가는 분주한 사람들의 발길과 함께 회자되었다. 그리고 종종 정해진 연주를 떠나 악단장을 당황케 하며 '신기'처럼 시작되는 나인틴 헌드레드의 즉석 피아노 연주는 버지니아 호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기다리는 이벤트가 되었다. 

나인틴 헌드레드적인 삶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스틸 이미지

원심력의 시대였다. 낡은 유럽을 떠나 신대륙의 가능성을 찾아 자신을 던지는 시대였고, 새로운 대륙처럼 자신의 발전을 위해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게 어디 1900년대뿐인가. 자본주의 시대 이래로 늘 세상은 '확장적' 프레임 속에서 살아왔지 않은가. 우리 시대 역시 자아계발과 발전은 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이끄는 화두였고 이고 일 듯하니. 

그런 시대에 나인틴 헌드레드와 같은 삶이라니. 버지니아 호에만 있는 천재적 피아니스트라 처음엔 신기해하지만, 그 신기함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배를 떠나지 않는 그를 자폐적 인간형이라며 자신들의 삶의 척도에서 예단하고 조롱했다. 그리고 그를, 그의 음악적 재능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고자 했다. 당연히 그런 정도의 재능이라면 전 미국을 순회하며 그의 연주를 널리 알리는 게 인지상정이었던 시대, 그에게는 숱한 연주의 기회가 주어졌고 그의 음악을 레코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다가왔다. 

당대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라 찬사받던 젤리 롤 모턴은 그런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배에 머무는 그의 정체를 괴벽이며 겁쟁이라 조롱하며, 당당하게 배에 올라 배틀을 신청한 모턴. 그와의 세 번에 이른 배틀 과정은 그저 연주 경합이 아니라 나인틴 헌드레드가 누구인가를 보여준 결정적 장면이 된다. 

도전장을 내민 모턴의 연주에 나인틴 헌드레드는 그 어떤 사심을 넣지 않고 순수하게 감동하고 눈물마저 흘린다. 전장에 나간 듯한 그의 연주에 나인틴은 마치 아이처럼 가볍게 캐롤로 응수하고 반기며 그와 배틀의 의지가 없음을, 단지 음악으로 즐길 자세가 되어있음을 피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의지'를 당기는 모턴에, 이제 나인틴은 기꺼이 그의 연주와 같은 곡을 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변주하며 호응한다. 이 두 번째 연주는 중요하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스틸 이미지

그들이 연주했던 재즈,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서양 음악에 흑인의 정서를 곁들인 이 음악의 본령은 바로 그 '변주'와 '즉흥성'에 있었던 것. 그 배틀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나인틴 헌드레드가 그저 모턴의 음악을 되풀이했다고 웅성거릴 때 나인틴 헌드레드는 가장 '재즈적'으로 모턴의 음악에 화답했던 것. 즉 음악에 음악의 동지로서 화답하며 함께 즐기자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인틴 헌드레드가 음악을 음악으로 즐길 때 여전히 이겨야 한다는 의지에 사로잡힌 모턴은 나인틴 헌드레드의 권유에 눈을 돌리지 않은 채 세 번째 연주로 배틀을 불을 당긴다. 즉 웃으며 즐기자는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죽자고 덤빈 것이다. 더이상 자신의 권유와 즐김이 의미가 없자 나인틴 헌드레드는 예의 모턴이 했던 방식으로, 그리고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가장 극렬하고 치열한 연주의 한 장으로 모턴의 기를 눌러버린다. 애초에 이기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지만 굳이 그대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라면 기꺼이 응해주겠다는 태도로.

이 세 번의 과정을 통해 보여진 건 음악을 대하는 나인틴 헌드레드의 태도와, 세상 사람들이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과 다른 결을 살아가는 그의 삶의 맥락이다. 세상이 재즈를 소비할 때 그는 재즈의 본령에 충실했던 것. 그런 그가 세상 사람들이 원하듯 세상 밖으로 나갔을 때 행복할 수 있을까, 자신이 직접 연주하지 않는 음악을 거부하는 그의 음악적 고집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까. 

그렇게 굳이 ‘세상의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던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변화'의 시간이 다가왔다. 레코딩으로 그의 음악을 남기겠다는 사람들과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던 그의 눈에 띈 여인. 스토커처럼 그녀를 찾아들던 그는 그녀가 배에서 내리자, 오래도록 그에게 세상 밖으로 나가라 종용하던 맥스에게 버지니아 호에서 내리겠다는 결심을 밝힌다.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손 흔들어 그의 하선을 반기던 날 그는 문득 눈 앞에 펼쳐진,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러나 한없이 열린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게 잠시 계단에서 그곳을 바라보던 나인틴 헌드레드는 배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은 영화의 결말에서 본 그것과 같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포스터

88개, 피아노 건반 개수처럼 시작과 끝이 있는 곳, 그곳이 나인틴 헌드레드에게는 버지니아 호였다. 그에게 세상은 그런 88개의 건반이 무수히 펼쳐진 곳이다. 그는 무수히 펼쳐진 88개의 건반 대신, 자신이 잘 칠 수 있는 단 한 대의 건반을 선택했다. 

그렇게 세상에 펼쳐진 무수한 건반에서 뒤로 물러선 나인틴 헌드레드를 떠올리게 되는 건, 1998년에 제작된 영화를 2020년 마스터피스로 다시 찾아보는 우리의 마음과도 같지 않을까. 무려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하게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건 그 자체로 마스터피스인 엔리오 모리꼬네의 음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늘 새로운 것, 더 넓은 세상을 갈구하며 뛰어가는 우리에게 단 한 척의 배, 그곳의 피아노를 자신의 삶으로 살았던 한 사람, 나인틴 헌드레드의 태도는 어쩌면 이해불가한 삶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늘 새로운 것, 더 많은 것을 갈구하며, 사실은 그 속에서 진정 내가 원하는 그 하나를 찾아내기 위해 허덕이고 있음을 깨달을 때, 나인틴 헌드레드를 조롱해 보려 했지만 결국 그의 음악에 무릎 꿇은 채 연주회장을 떠났던 모턴과 같은 마음이 들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가 선택했던 88개의 건반조차 제대로 쳐내지 못한 채 또 다른 건반의 잿밥에 홀려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이 몸담았던 공간, 자신이 연주했던 피아노와 함께 기꺼이 인생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그 삶의 처연한 겸손과 최선이 그래서, 2020년 벽두에 떠오르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기에 올해는 진짜 자신의 것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고 최선을 다해 그 88개의 건반을 아름답게 연주해 내는 일에 몰두해 보면 어떨까 싶다. 자신이 직접 연주하는 그 순간이 아니라면 그건 자신의 연주가 아니라던 나인틴 헌드레드의 그 '외통수 고집'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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