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미스터리 작가 할란 트롬비의 85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두 모인 고딕풍의 저택.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오붓한 생일파티가 벌어진 다음날, 할란의 시체가 발견된다. 사인은 경동맥을 스스로 끊은 자살로 추정된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누구에게 고용됐는지 본인조차 모르는 명탐정 브누아 블랑이 경찰과 함께 저택을 방문해 가족들의 증언을 듣는다.

블랑의 탐문이 진행되며 저마다 할란과 빚고 있던 갈등이 드러난다. 할란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를 경영하던 막내아들은 넷플릭스에 판권을 팔자고 조르다 해고됐고, 큰사위는 외도하는 장면을 장인에게 들킨다. 손녀의 대학등록금을 이중으로 청구하다 생활비가 끊긴 며느리와 할란이 아끼던 손자는 가족들에게 똥이나 먹으라는 탕아다. 결정적인 범행동기로 보기에 무게감은 떨어지지만 개연성은 충분한 사정들이 펼쳐지며 긴박한 전반부가 흘러간다.

범인이 중요하지 않은 추리영화

하지만 영화는 범인을 숨길 의지가 없다. 곧장 범인을 공개하기 때문이다. 범인은 할란의 간병인 마르타. 마르타는 실수로 약병을 착각하고 모르핀을 과다투약해 할란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평소 마르타에게 가족보다 깊은 친밀함을 느끼던 할란은 마지막으로 베스트셀러 미스터리 작가의 역량을 발휘해 자살로 위장할 수 있도록 마르타를 돕는다.

마르타는 거짓말을 하면 구토를 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설상가상 블랑의 조수로까지 채용된다. 좁혀오는 수사망에 가슴 졸이지만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며 그럭저럭 완전범죄에 다가선다. 그러나 할란의 죽음보다 더 큰 비밀이 밝혀지며 마르타에게 고난이 닥친다. 8,000만 달러에 달하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마르타에게 넘긴다는 할란의 유언장이 공개된 것이다.

평소 마르타를 가족이라 말하던 할란 패밀리는 유언장이 발표되자마자 상속받을 자격이 없다며 그녀를 압박한다. 가족’처럼’ 대할 수는 있지만 가족은 아니라는 선언이다. 유언장에 명시된 내용이라 무를 수 없다는 변호사의 말에 무임승차 하는 게 어딨냐고 따진다. 심지어 불법체류자인 마르타의 어머니를 들먹이며 미국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상속을 포기하라고 협박한다.

<나이브스 아웃>은 유언장 발표를 기점으로 클래식한 추리극인 전반부가 끝나고 사회극이 가미된 후반부가 시작된다. 한 가지 주제가 덧대진 후반부의 동력은 ‘선(Line)’이다.

선을 넘는 녀석들

2019년을 상징하는 문화 키워드는 ‘선’이었다. 선을 넘나드는 캐릭터(펭수, 장성규)가 국내에서 큰 화제를 모았고, 선을 두고 일어난 비극을 다룬 영화 <기생충>은 전 세계 영화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하필 2010년대의 마지막 해에 ‘선’이라는 키워드가 전 세계에서 주목 받은 이유는 사회 도처에 그어진 경계에 대한 범국가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볼 게 있다. 선의 안팎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국가? 인종? 종교? 아니면 능력? <기생충>을 떠올려보자. 으리으리한 집에 사는 박 사장 가족과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반지하에 사는 기택 가족의 차이점은 재산을 빼고는 찾기 어렵다. 같은 국가, 같은 인종에 가족 구성마저 똑같다. 8캔에 만원인 필라이트로 가족회식을 하지만 기택 가족은 박 사장 가족을 깔끔하게 속여 넘길 만큼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들이기도 하다.

기정은 웹서핑으로 훑은 미술치료 지식만으로 고등교육을 받았음이 분명한 연교를 홀리고, 기우은 뼈대 있는 집안 민혁에게 무려 ‘영어과외’를 제안 받고 ‘대학 와서 술만 처먹는 x새끼들보다 네가 더 잘 가르칠 걸?’이라는 인정을 받는다. ‘38선 이남은 빠삭하다’며 고급외제차로 우아한 코너링을 선보이는 기택. 입주하자마자 상류층의 집안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충숙은 말할 것도 없다.

<나이브스 아웃>에서 할란 패밀리가 마르타에게 그은 선도 기준이 모호하다. 상속의 자격은 무엇인가. 무임승차는 할란 패밀리의 격분과 달리 모두가 인정하듯 할란이 속마음을 터놓는 유일한 인물은 마르타였다. 할란에게 빨대 꽂아 생계를 의지하는 가족들과 달리 억만장자의 신뢰를 얻은 출중한 자수성가형 인물이기도 하다. 혈연이 상속의 절대적 근거는 아니므로 마르타가 배제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 지점에서 국가 단위의 선을 긋고 있는 트럼프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에게 100만 달러를 빌려 부동산업으로 성공한 큰딸이 ‘이 저택은 선조들이 살아온 우리 집이야!’라고 외치자 블랑이 ‘이 집은 댁의 할아버지가 1988년에 파키스탄 사업가에게 매입했습니다’라고 반박하는 부분은 <나이브스 아웃>의 명확한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유난히 붉은 슈트를 즐겨 입는 큰딸이 부동산 전문가라는 설정은 우연일까 제작진의 치밀한 설정일까. 붉은 넥타이를 즐겨 매는 트럼프가 장벽을 치고 있는 곳이 사실은 멕시코의 땅이었고 이전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터전이다. 따지고 보면 트럼프도 독일 이민자 후예다. 먼저 선을 넘은 게 누구인지는 명확하다.

정당한 승계의 조건

명탐정이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어딘가 허술한 블랑은 ‘사건의 진실보다 진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을 남긴다. 국적, 인종, 성별은 개인을 설명하는 객관적 사실들이지만 훌륭한 시민임을 증명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시민 개개인이 덕성을 쌓는 일이고, 이것이 선조들이 쌓아온 사회적 자본을 정당하게 승계할 수 있는 조건이다. 이 조건에 부합하는 건 미국에서의 추방을 각오하고 마지막까지 선량함을 지키며 자수성가한 마르타인가. 혈연을 빼면 내세울 게 없는 할란 패밀리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말에서 마르타는 머그잔을 들고 2층 발코니에서 1층의 가족들을 내려다본다. 마르타의 손에는 할란의 가장 개인적인 유산인 머그잔이 들려 있다. 별다른 장식 없는 흰색 머그잔에는 선명한 붉은색으로 다음과 같은 문구만 적혀 있다. ‘내 집, 내 규칙, 내 커피’. 가족들은 할란이 피로 쓴 유언장 같은 머그잔 아래에서 입을 굳게 다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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