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계절에 시작해서 나뭇잎이 떨어지는 계절에 마무리된 <KBS 1TV 다큐 인사이트 - 세상 끝의 집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 3부작을 보고 나니 문득 안도현의 시가 떠올랐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도대체 얼마나 깊고 진한 사랑이기에 그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평생 결핍을 감내하며, 고독과 침묵의 여정을 기꺼이 안을 수 있단 말인가.

한 해가 저무는 시절에 만난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의 수사들은 지나온 1년간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겸허하게 반성케 한다.

위대한 포기의 삶

KBS 1TV 다큐 인사이트 <세상 끝의 집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 3부작

경북 상주 산곡산 깊은 곳에 수도사들의 공동체가 있다. 일찍이 1084년 성 브르노가 프랑스 사르트뤄즈 계곡에 세운 카르투시오 수도원은 엄격한 고독과 침묵의 수도 생활로 신을 향한 영원의 진리에 헌신해 왔다. 전 세계에 11곳 370명의 수도사만이 그 '희생'의 수도를 이어온 가운데, 15년 전 요한 바오로 2세가 경북 상주에 아시아 유일의 카르투시오 수도원을 허락했다.

한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크로아티아에서 온 11명 수도사가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사막'과도 같은 이 산자락, 수도원의 소음마저도 거세된 독방에서 침묵과 고통에 투신하고 있다. 하지만 수도사들에게 이곳은 '주님과 그분의 종이 함께 이야기하는 거룩한 땅'이다. 그러나 그 '주님이 약속하신 땅의 샘'에 다다르는 길은 건조하고 메마르다.

KBS 1TV 다큐 인사이트 <세상 끝의 집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 3부작

종소리에 따라 하루의 활동을 하는 수도사들. 기도방, 작업실, 텃밭으로 이뤄진 독방에서 봉쇄 수도사들은 온종일 기도와 묵상을 한다. 반면 평수사들은 기도와 묵상과 함께 '노동의 소임'을 감당한다. 인터넷, 전화, 신문 등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수도사들 사이의 이야기는 '서면'으로 대체된다. 유일한 대화라면 짧은 한국어 수업, 형제적 일치를 위한 산책, 주말의 정찬뿐이다. 심지어 일 년에 이틀만 부모님과 만날 수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가볼 수 없는 '위대한 포기'로 점철된 수도의 삶이다.

한 달에 한번 이 수도원 설립시절부터 조력자 역할을 해온, 초대 안동 교구장이었던 두봉 주교와의 자유토론 시간, 이날의 화두는 '얼마나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살아가셨듯 그분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누기 위해 가난을 모토로 삼은 수도사들. 가난을 통해 자신을 비우고 겸손하게 초연해져 점점 더 하느님을 깊이 이해하게 하는 삶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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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결핍

KBS 1TV 다큐 인사이트 <세상 끝의 집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 3부작

세상의 재물에 대한 자유로운 포기, 불필요한 욕망을 극복하고 해방됨은 수도사들의 구멍 난 양말, 실처럼 헤어져 가는 옷가지, 육식 없는 소박한 밥상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심지어 매주 금요일에는 극기를 위해 밥과 물만으로 식사를 한다. 그것도 독방에서 홀로.

한국어 교습 시간에 등장한 금식- 바나나 한 개와 쌀밥 한 공기, 밥을 반 정도 먹다가 바나나를 한 입 베어 무니 그 맛이 짜더라는 소회. 심지어 그마저도 자꾸 바나나에 의지하게 되는 거 같아 안 먹게 되었노라 한다. 완벽하게 끊는 게 외려 어려운 거 같지만 더 쉬웠다는, 타협이 아니라 기꺼이 ‘결핍을 껴안는’ 삶의 태도이다.

그 결핍의 식사를 이뤄내는 건 평수사들의 '노동'이다. 밭을 갈다가도, 음식을 만들다가도, 재봉틀을 돌리다가도 종소리가 울리면 흙바닥에서 머리 조아려 기도하는 수사들의 노동은 그리스도께 자신들을 결합하는 기꺼운 '봉사'이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란 모토 아래, 수도사들 각각이 꾸린 텃밭에서 난 생산물들을 11 형제가 나누어 생활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따라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삶의 태도이다.

세상을 향한 기도

KBS 1TV 다큐 인사이트 <세상 끝의 집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 3부작

고독과 기도, 그 봉쇄된 삶을 보며 문득 저 기도의 의미가 무엇일까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 '의문'에 오랜만에 가족을 만난 한 수사의 이야기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봉사하는 삶을 사는 수녀님을 누나로 둔 수사님은 얼마 전 종신 서원을 했다. 어렵사리 걸음 하신 외할머님께 하느님과 결혼했다고 밝은 얼굴로 자랑하는 손자, 그런 할머니 옆에서 자신도 하느님과 결혼을 했다고 역시나 밝은 얼굴로 덧붙이는 누나 수녀님.

일년 만에 오누이의 대화는 서로가 다르게 하느님을 향하는 길로 이른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병원에서 일하는 수녀님의 삶에 늘 고맙다는 동생. 늘 기도하는 동생이 자신의 기도 때마다 떠오른다는 누님. '봉사'로 다할 수 없는, 세상 가난한 이들에 대한 마음을 동생에게 빚진다고 누님은 말한다. 그리고 누님의 말처럼 또 다른 수사의 기도하는 시간은 낯선 땅 낯선 이의 간절한 사연과 함께하고, 파란 눈 이방의 수사의 간절한 기도는 북녘땅 가난한 동포들에게 닿는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은둔하지만 그들의 기도, 그들의 마음은 온전히 세상 속 그 누구보다 세상을 향해 열려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평생 수도의 삶을 선택하는 그 마음을 쉽사리 헤아리기 어렵다. 세상의 일로 이루어내지 못한 그 여지를 기도로 채우는 그 '이타성' 역시 물성의 시대에 낯설기까지 하다. 25년 된 구두와 닳아 테이프로 묶은 슬리퍼, 앞뒤로 구멍 난 양말이 당연하다는 듯 신고, 죽어서도 봉쇄된 그곳을 떠나지 않은 채 절대자를 향한, 그리고 그 절대자가 품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오늘도 정진의 길에 고뇌하고 성실하게 맡은 바 책무를 다하고자 애쓰는 이들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인간의 원형'처럼 울려온다.

홀로 기도하는 수사의 맞은편에 A4 용지에 선 두 개로 그어진 십자가가 있다. 그 어떤 성물보다도 숭고해 보이는 십자가야말로 카르투시오 수도사들의 삶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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