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SBS ‘가요대전’ 리허설 도중 걸그룹 레드벨벳의 멤버 웬디가 부상을 당했다. 소속사 SM 엔터테인먼트는 얼굴 부위 부상 및 오른쪽 골반과 손목 골절이라는 의료진 소견을 전했다. 소견만 들어도 작은 부상 같지 않다.

레드벨벳의 무대는 사전 녹화 분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뉴스엔 기사에 따르면, 웬디는 2층 터널 무대에서 콜라보 무대를 가질 예정이었고, 2m 높이의 리프트에 오르려다 현장 상의 문제로 낙상사고를 겪었다고 한다. SNS에서는 리허설 현장을 지켜본 각 출연진의 팬들이 리프트가 위험해 보였다거나 안전상의 문제에 우려가 있었다는 말을 전했지만 진위는 알 수 없다. 현장을 주관하는 SBS 측에서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9 SBS <가요대전>

SBS는 웬디의 부상 소식이 보도된 후 사과문을 발표했다. 단 세 문장으로 엮인 사과문이다. 거기엔 사고 경위 설명이 없고 웬디에게 전하는 사과도 없다. 사과 대상은 “팬 여러분 및 시청자들”이다. 웬디의 빠른 쾌유를 바란다는 말과 “향후 안전 관리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겠다는 말로 글은 끝난다. 사고를 겪은 당사자에게 또렷한 사과를 전하지 않은 건 그 자체로 문제다. 레드벨벳은 얼마 전 신곡 'Psycho'로 컴백했다. 음원 차트 1위를 차지하는 등 좋은 분위기를 몰아 활동을 재개했지만 이번 사고로 후속 활동이 불투명해졌다.

하지만 당사자에 대한 사과 표현의 부재로 인해 사고의 피해자와 책임자라는 인과관계의 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다.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겠다? 어떤 종류의 주의를 왜 기울이겠다는 건가? 사고가 일어난 경위를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저런 말이 무엇을 이해시키고 담보할 수 있을까? SBS의 사과는 불충분할뿐더러 책임 회피성이란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레드벨벳의 생방송 출연이 취소되자 그룹의 팬들을 돌려보냈다는 말도 떠돈다. 사실이라면 이 역시 자신들이 주관하는 현장에서 일어난 사고로 피해를 입은 주체들에게 취할 예의가 아니다.

방송 제작 중 사고는 어떤 방송사에서든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SBS에서 이런 종류의 문제가 종종 논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불과 올 6월에도 예능 방송 ‘정글의 법칙’에서, 태국 로케를 가 멸종 위기종으로 보호받는 대왕 조개를 캐 먹는 장면이 방영돼 외교적 뉴스로 비화됐고 제작진은 해명을 번복하며 논란을 불렀다. ‘가요대전’도 마찬가지다. 이 방송은 지난 몇년 간 영상 및 음향에 오류가 생기는 방송 사고가 너무 자주 벌어졌다. 2015년에는 출연자를 두고 무어라 말하는 현장 스태프 음성이 그대로 송출됐고, 다음 해에는 트와이스의 무대 도중 다른 걸그룹 여자 친구의 노래가 나왔다. 특히 2015년에는 무대 구성과 방송 연출에 문제제기가 잇달아 제작진이 직접 인터뷰까지 했다. 그럼에도 올해에는 안전사고마저 일어났다. 지상파 방송사가 가져야 할 책임감과 방송 제작 역량, 일 년에 한 번 치르는 연말 가요제를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상식적 추측에 비추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태국에서 대왕조개를 채취한 SBS <정글의 법칙> (사진=SBS 방송화면 갈무리)

지상파 연말 가요제엔 더는 예전 같은 위상이 남아 있지 않다. 일본의 지상파 방송 NHK의 홍백가합전은 국가적 위상을 가진 연말 가요제다. 여전히 시청률이 40%에 육박하고 홍백에 출연한 가수들이 얻는 인지도 상승과 음악 세일즈 효과 등 파급력이 여실하다. 한국의 연말 가요제는 지상파 3사 모두 고작 한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할 뿐이다. 인상적 연출과 퍼포먼스가 있어 사람들에게 회자되지도 않는다(반대의 의미로 회자된 적은 많다). 자사의 음악 방송에 출연했던 아이돌 그룹을 주된 출연진으로 섭외하지만, 글로벌화된 케이팝의 동향과 달리 해외 케이팝 팬들이 주목하는 무대도 아니다. 무대 연출의 세련미 역시 Mnet의 연말 가요제 MAMA에 미치지 못한다. 냉정하게 말해,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하고 출연진에게도 특별한 메리트는 없다. 지상파 연말 방송의 섭외 리스트가 주는 나름의 브랜드가치가 있겠으나, 방송 자체로 얻는 화제성이 없고 섭외에 누락 됐을 때 아쉬운 정도랄까? 도리어 출연진 섭외와 분량 배분이 구설수에 오르기 일쑤고, 엔딩 무대를 누가 장식하느냐는 부질없는 자존심 싸움이 벌어진다.

실은 지상파 자체가 퇴락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케이블 방송과 JTBC는 자기 분야의 전문성과 콘텐츠 제작 역량에서 지상파를 일찌감치 추월했다. 지상파 방송 하나가 인기 유튜브 영상 이상으로 파급력이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새로운 미디어, 작은 미디어가 스마트폰을 타고 울창한 시대에 기성 방송의 기득권이 저물고 있다. 앞서 홍백가합전을 언급했지만, 아직까지 방송 출판 매체의 영향력이 강한 일본의 지상파 방송과 여건이 다른 구조적 정세이기도 하다. 이런 정세에서 아직도 지상파가 의지할 수 있는, 지상파이기에 벼릴 수 있는 무기가 있다면 무엇일까? 오래된 미디어로서 세월의 퇴적 속에 다져 온 이름이 주는 신뢰와 권위일 것 같다. 가령 케이블, 인터넷 방송과 달리 지상파 방송은 안전 관리와 같은 책무를 우선시한다는 믿음을 주는 것, 기왕 사고가 벌어졌다면 그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여타 매체에 본보기를 보여주는 일이 그렇다.

지금 한국에 그 이름 하나로 '약속'이 되는 문화적 권위를 가진 주체가 존재하긴 하는 걸까? 케이블 방송계의 거부 CJ E&M이 상업적 힘은 갖추었지만 도덕적 권위가 부재하다면, 지상파 방송은 상업적 능력도 도덕적 신뢰감도 보여주지 못하는 건 아닐까? 올해 가요대전의 안전사고는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사고 자체를 넘어 그에 대한 사후 대응이 SBS란 이름이 품은 권위를 스스로 헐뜯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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