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를 억지스레 우리말로 변환한 영화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게 합니다. 대표적으로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싸구려 제목을 달았습니다. 물론 가끔은 꽤 쓸 만한 작품도 있습니다. 영화는 아니지만 <노르웨이의 숲>은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제격이었죠. 그리고 <Paul>이라는 한 단어가 심심해 보였는지 잔뜩 수식어를 달아준 이 영화 <황당한 외계인 폴>도 썩 맘에 드는 제목의 예로 삼고 싶습니다.

<황당한 외계인 폴>의 주인공인 그램과 클라이브는 둘도 없는 단짝이자 S.F. 장르의 광팬입니다. 오죽했으면 매해 샌디에고에서 열리는 '코믹콘'에 가고자 잉글랜드에서 미국으로 날아왔을까요. 여하튼 마침내 오랜 바람을 이룬 두 사람은 물 만난 고기처럼 즐거워합니다. 급기야 이들은 내친 김에 캠핑카를 빌려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자들의 성지인 '51구역'으로 향합니다. 그리하여 '외계인 고속도로'로 명명된 네바다의 고속도로를 유랑하다가 뜻밖에도 진짜 외계인과 맞닥뜨립니다. 그건 그렇고 정말 골 때리는 건, 이 외계인이 말 그대로 황당한 외계인입니다.

외계인은 무시무시하거나 신비한 존재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게 웬걸요!? 이 녀석은 영어 구사능력이 어찌나 훌륭한지 입담이 걸죽하다 못해서 음담패설도 우습습니다. 게다가 담배까지 뻑뻑 피워대고 지구의, 정확히 미국의 과자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이름을 폴이라고 밝힌 이 외계인은 말 그대로 황당한 외계인이고, 숫제 외계인 양아치입니다 ㅋㅋㅋ 이렇게 뭉친 세 사람에다가 몇 명이 더 엮이면서 황당한 외계인 폴은 좌충우돌 지구 탈출기를 감행합니다.

코미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를 모를 수 있을까요? 국내에 개봉도 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이들은 <새벽의 황당한 저주>로 마른하늘에 치는 날벼락처럼 별안간 나타났습니다. 이 영화에서 제대로 얼빠진 콤비를 연기하던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 그리고 감독인 에드가 라이트의 하모니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죠. 이 세 사람은 공포의 대상인 좀비를 이렇게까지 우스꽝스러운 시체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 장본인입니다. 그 인기에 힘입어 국내에 개봉한 <뜨거운 녀석들>은 또 어떻고요.

또 한번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가 뭉친 <황당한 외계인 폴>에는 에드가 라이트가 빠졌습니다. 아마 <스콧 필그림 대 월드>를 연출하느라 그런 것 같은데, 그를 대신해 메가폰을 잡은 그렉 모톨라도 자기 몫은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황당한 외계인 폴>은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의 콤비네이션이 건재하고 각본 또한 여전히 재치가 넘칩니다. 전작에서 좀비와 액션 영화를 뒤집어 엎어버린 두 사람이 이번엔 S.F., 그중에서도 외계인 영화를 먹잇감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가 비록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는 못 미처도 장르의 팬이라면 반색할 요소가 수두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황당한 외계인 폴>은 <써커 펀치>와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두 영화 모두 특정 팬을 충족시켜준다는 면에서 말이죠.

우선 <황당한 외계인 폴>은 오프닝의 무대부터가 열광적인 반응을 얻을 만한 곳입니다. 바로 '코믹콘'! 코믹스의 팬들을 위한 연례행사인 코믹콘은 종종 블록버스터 영화의 영상을 미리 공개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제가 그렇듯이 영화와 만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라도 한번 가보고 싶을 걸요? 코믹콘의 뒤를 이어 그램과 클라이브가 캠핑카를 타고 향하는 51구역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죠. 이건 외계인에게 단 1그램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누구라도 아는 곳입니다.

51 구역을 위시하여 펼쳐져 있는 외계인 고속도로는 또 어떻습니까? 심지어 '외계인 고속도로(Extraterrestrial Highway)'는 네바다에서 공식적으로 부여한 이름입니다. (정식 도로명은 'State Route 375'입니다) 그 밖에도 외계인 신봉자들의 집결지라는 '검은 우체통'과 'A'Le'Inn'이라는 교묘한 이름을 내건 여관도 실존하는 곳입니다. 이러니 어찌 <황당한 외계인 폴>을 보면서 즐겁지 아니한가!?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것은 역시 황당한 외계인으로 등장하는 폴입니다.

전작에서처럼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가 패러디하고 있는 이 외계인은 참말로 유쾌하고 사랑스럽습니다. 둘의 패러디 정신이 기특하게 느껴질 지경이에요. 외계인 주제(?)에 욕설부터 시작해 흡연까지 즐기는 이 친구가 전혀 얄맙지 않으니 말입니다. 세스 로건의 천연덕스러운 목소리까지 더해지니 아주 귀여워서 꽉 껴안아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리고 <E.T., 엑스파일>의 제작에 얽힌 비화나 밥 딜런의 정체 등에 얽힌 음모이론은 뻔한 수법이지만 언제 들어도 재미있습니다. 특히 결말부에서 주인공들이 가는 장소를 아는 분들은 뜻하지 않은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실 겁니다.

종교에 미친 광신도에겐 답이 없다는 것이나, 그램에게 고속도로 순찰대(?)가 "잉글랜드에는 총이 없다던데 그럼 뭘로 쏘지?"라고 말하는 등, 언뜻 미국을 떠받드는 듯하면서 에둘러 까는 기발함도 돋보입니다. 다만 한 가지 흠을 꼽자면, <새벽의 황당한 저주, 뜨거운 녀석들>에 비하여 다소 얌전한 분위기는 못내 아쉽습니다. 아무래도 감독이 바뀐 탓이 크겠지만, 에드가 라이트의 시끌벅적하고 정신 사나운 편집과 연출이 조금 그리웠습니다. 대신에 그것은 에드가 라이트 특유의 현란함을 몇 배는 더 배가시킨 <스콧 필그림 대 월드>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


덧 1) 공교롭게도 오늘 뉴스를 보니 로스웰 사건과 관련한 공식 문서를 FBI가 공개했다는군요. 이게 <황당한 외계인 폴>의 흥행에 영향을 줄까요? 설마 제작사와 FBI의 짜고 치는 고스톱은 아니겠죠? (전 음모이론 신봉자는 아닙니다 ㅎㅎ)

덧 2) 폴이 스티븐 스필버그와 통화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방금 확인해보니 진짜 스필버그의 목소리였더군요!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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