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열쇠 구멍으로 전 장면이 드러날 때가 있다. ‘12시가 되면은 문을 닫는다~’는 구전 동요로는 절대 닫을 수 없었던 남대문은 결국, 장렬한 죽음으로 닫히고 말았다. 흉측한 도형(figure)으로 변해버린 남대문을 보며, 이 하나의 닫힌 죽음이 무수한 열린 죽음을 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두렵고 또 두려워진다. 험악한 개발주의로 국가 공동체의 운명을 구렁으로 몰아가려는 대운하 선동이 난무하는 시대에 국보 1호라 불렸던 최고의 목조 건물이 하릴없이 쓰러졌다. 그렇다. 하나의 스펙타클이 더욱 참혹할 다음 스펙타클을 예고하는 트레일러가 되는 위험한 사회에서 우리 살고 있다.

흉측한 남대문의 디테일은 그 자체로 볼썽사납다. 한국 사회가 놓여있는 색감을 반영하듯 농후하고, 예고보다 잔혹할 본편의 분위기를 암시하듯 검푸르다. 지켜보는 날씨의 매서움까지 더해져 도저히 화사한 봄이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게 만든다. 이 와중에 이명박 당선자는 국민 성금으로 남대문을 복원하자는 결정적 멘트를 날린다. 친절하고 익숙한 바로 그 음성, 예고편을 마무리짓는 단발마 ‘coming soon'이다. 이명박 당선자는 소 잃으면 외양간 고쳐야 하는데, 새 외양간은 국민의 힘으로 짓자는 뭐 그런 레토릭을 사용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남대문은 불우이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외양간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린 왜 소를 잃었고, 어쩌다가 소를 잃기만 하면 외양간부터 생각하는 멘탈리티(mentality)를 지니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아울러 이번에 소를 잃어버린 직접적 이유가 남대문을 개방하여 최소한의 매뉴얼조차 만들지 않았던 이명박 전 서울시장 때문은 아닌가, 그리고 또 소를 잃자마자 외양간 타령부터 늘어놓는 이명박 당선자의 멘탈리티(mentality)는 대체 한국 사회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가 하는 점인가를 확인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 한국일보 2월13일자 1면.

서울은 2000년 이상 사람들이 손때를 묻혀온 공간이고, 왕권에 의해 600년 전에 세워진 도시이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중심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서울은 지리 환경 결정론의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자원 경제성이 높은 장소이다. 그래서였을까? 서울만의 고유한 장소성과 역사성은 그간 지속적으로 그리고 총체적으로 파괴되어 왔다. 경제적 효율에 입각한 이동의 속도 이외의 가치들을 고려할 시간도 능력도 없었던 천박한 욕망들은 서울의 지형 곳곳에 실패를 남겼고, 지금 이 순간에도 회복하기 어려운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파괴와 폭력의 한 복판에 이명박 당선자가 있었다. 공업화 시대의 효율과 속도를 상징하기 위해 청계고가를 세울 때도, 이를 지식 경제 시대의 상징물로 리모델링한다며 인공 하천으로 ‘재개발’했을 때도 이명박 당선자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 반복된다. 그는 자연적인 물길을 인위적으로 메우고 그 위에 흉물스런 고가를 얻는 개발의 시대와 자연적인 물길을 회복시킬 방법이 없어 인공을 동원해야 하는 재개발의 시대에서 아무런 책임을 갖지 못한 채 시차 없이 살고 있는 불굴의 인물이다.

▲ 경향신문 2월12일자 1면.
‘신개발주의, 네오파시즘, 불도저 리더십, 박정희식 모델, 졸속, 밀어붙이기, 고삐풀린 개발주의자, 포크레인의 후예’까지 이명박 당선자의 서울시정을 표현하던 말들이다. 이명박 시정은 개발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은 짧은 파괴의 순간밖에 없다는 것을 명제화한 시간이었다. 행정을 시각화한 그의 전술은 화려했고 찬란했다. 시장 취임 2주년에 딱 맞추어 개편됐던 버스체제는 붉은색 아스콘이 인상적이었던 중앙차선과 지랄염병(GRYB)으로 불리웠던 알파벳 대문자 논란으로 점철되며, 공공성과 관련된 중요한 논란(공공 요금의 사회적 책임을 망각했던 ‘거리병산제’, 장애인 접근성의 문제, 노선, 번호, 요금 변화에 따른 혼란 등)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시청 앞 잔디마당은 어떠한가? 민주 사회에서 광장의 의미, 무자비한 복지 예산의 축소, 선정 과정의 비민주성에도 불구하고 잔디는 깔리고 광장의 위용은 오늘도 드높다. 그 광장은 애시당초 우리가 생각하는 광장이 아니었다. 앙드레김의 새하얀 드레스를 걸치고 하이서울페스티발의 피날레에서 모든 언론의 셔터가 작렬하는 순간을 즐기고 싶었던 그의 광장이었다. 이 때문에 서울 시청 앞에는 잔디가 깔리고 수천만원의 영양제를 머금은 스프링클러는 돌아갔다. 이명박식 친환경은 시장 집무실 풍경으로 전락하여 영원한 생명력을 얻었다. 한 마디로 근사했고 모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지나친 독설과 빈정이라고 좌절하지 마시라. 다행히도 롤랑바르트가 ‘근사함’이란 단어를 새롭게 정의해주었다. 근사함이란 말의 피로, 언어의 피로의 조그만 흔적이다. 논리의 부재, 이성의 마비의 반영이다. 결국 근사함의 마지막 철학은 ‘동어반복’의 실천 밖에는 없다.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했던 이명박 시정의 눈부신 미혹이 남대문의 순수한 자살로 점차 실체화되고 있다.

서울시가 아닌 한국 사회를 근사하게 만들겠다는 이명박 정부이다. 한껏 폼을 내고 두 팔을 벌리고 있지만 한 쪽에는 ‘태양시장’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욕망이 다른 한 쪽에는 토건 자본의 경제적 필요가 걸려있어 모양새가 편안해보이지는 않는다. 그 품으로 품을 수 있는 세상이란 너무 편향적이란 것을 모두가 대강 알아버렸다.

모든 이미지는 부패된다. 이명박 당선자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남대문은 부패의 점이다.

학교라고 믿었던 사회운동을 휴학하고 몸을 더듬어보니 라이타 한 개밖에 없더라는 싸구려 열정에 여전히 감격하는 청년 백수. 을용타에 열광하는 청년 백수들이여,라이타(right-打)하라! 오른쪽을 때려라!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