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미친존재감'에 열광하고 있다. 이른바 미친존재감 신드롬이다. 처음엔 생소한 인터넷 은어 같았지만 이젠 일상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신문도 미친존재감에 대한 보도에 열을 올린다. TV 프로그램 속에서도 미친존재감에 대한 대화를 흔히 볼 수 있다. <무한도전>은 이를 캐릭터로 만들기까지 했다. 대중이 미친존재감을 원하기 때문이다. 미친존재감을 사랑한 나머지 네티즌은 미친존재감을 찾는 놀이까지 즐기고 있다. 우리는 왜 미친존재감에 이렇게 열광하는 것일까?

미친존재감이란 말이 회자된 것은 <아이리스> 때부터였다. 그때 김승우와 김소연이 미친존재감으로 찬사를 받았다. 그들은 주연이 아니었는데도 마치 주연과 같은 존재감을 느끼게 했다. 네티즌이 여기에 특히 열광한 것은 기존의 1급 스타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아이리스>엔 김태희가 나왔었다. 김태희는 전지현 등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스타였다. 이른바 CF퀸이다. 사람들은 이런 스타들이 누리는 과도한 지위에 불편함을 느꼈다. 잘생기고 예쁘고 스타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막대한 출연료를 받으며 주연을 도맡아 하는 것 말이다. 조연이나 스텝들은 그늘에 있는데 1등 스타들은 날로 화려해지고 있다. 미친존재감은 그런 1등에 대한 약자의 반란으로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김소연이 그렇게 열광적인 찬사를 받은 것이다. 당시 김소연은 김태희에 비해 스타성에서 상대도 안 될 만큼 미약한 존재였고 배역의 비중도 작았었다. 그런 그녀가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렇게 스타의 그늘에 가려졌던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의 노력과 재능, 개성으로 환하게 빛나는 모습에 사람들은 통쾌함을 느꼈다. 그런 정서 때문에 연말 연기대상에서 김태희가 연기본상을 받고 김소연이 인기상 같은 '언저리상'(?)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더욱 김소연에게 몰입했던 것이다.

미친존재감을 일상어의 수준으로 널리 사용되게 만든 건 <추노>의 성동일이었다. <추노>의 여주인공은 선녀소복 신부화장으로 유명한 '민폐 캐릭터' 이다해였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예쁘게 꾸민 모습이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다해에게 억울한 일이다. 이건 그녀 탓이 아니라 작가와 PD의 책임인데도 사람들은 그녀를 맹비난했다.)

<추노>의 남자주인공 중엔 오지호도 있었는데, 그 역시 치열한 연기력보다는 외모로 유명한 배우였다. 한편 성동일은 추악하게 분장한 천지호 역할을 맡았는데 그 비중이 주연들보다 현저히 작았었다. 아름다움과 추악함. 화려한 주연과 남루한 조연. 이 얼마나 선명한 대비인가! 이 대비 속에서 성동일이 성실한 연기를 보여주자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다.

이때 이후로 미친존재감을 찾는 놀이는 네티즌이 아주 사랑하는 그 무엇이 되었다. 그러자 매체들이 이에 부응하여 미친존재감 관련 기사들을 양산하고 TV가 본격적으로 조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미친존재감의 의미는 점점 확장하여, 꼭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주지 않아도 조연이나 단역이 어떤 이유로든 깊은 인상을 남길 때 미친존재감이란 말을 듣게 되었다.

1등이 아닌 미친존재감을 위하여

미친존재감 신드롬이 나타날 무렵 유행했던 <개그콘서트>의 대사가 있었다. 바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다. 이 대사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실을 정확히 표현해주는 말이라고 사람들은 찬사를 보냈다. 그 전엔 '분장실의 강선생님'이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이 코너는 철저한 위계구조 속에서 무명 개그맨들이 1인자와 2인자에게 휘둘리며 그들을 위해 소모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도 국민들은 통렬한 공감을 느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그 자체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타급 주연만 대우받는 연예계는 우리 현실의 은유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좋은 외모를 타고 났다는 이유만으로 1등이 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독식했다. 우리 현실에서도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이 1등의 인생경로를 가게 되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미친존재감 신드롬에는 이런 승자독식사회에 대한 사람들의 억울함이 담겨져 있다. '왜 1등만 대접받아야 하는가? 나는 무가치한 존재인가?'라는 항변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슈퍼스타K>의 허각에게 열광했던 것도, 그가 보여준 약자의 반란 스토리가 통쾌했기 때문이었다.

장기하나 '세시봉'에 대한 열광도 그렇다. 대형기획사의 아이돌들이 가요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럴 때 한 인디 가수가 자기만의 개성을 보여주고, 또 흘러간 옛 가수들이 존재감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숨이 트이는 것 같은 시원함을 느꼈다. 물론 세시봉 열풍을 이런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거기엔 그들의 실력과 컨텐츠의 힘 그리고 향수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독점적 기득권 구조 바깥의 사람들이란 것도 분명히 열풍의 한 원인이 되었다.

사실 1등은 언제나 한 명일 수밖에 없고, 강자는 언제나 소수일 수밖에 없다. 그들만 대접받는다면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 우리 서민들의 삶이 너무 우울하지 않은가? 그런 답답한 세상에선 모두가 서서히 질식해갈 것이다.

1등 꼴등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개성과 노력으로 반짝반짝 빛날 수 있다면, 모두가 저마다의 삶터에서 미친존재감일 수 있다면 우리 세상은 얼마나 풍부해질까? 미친존재감 신드롬에선 이런 서민의 소박한 꿈을 읽을 수 있다.


문화평론가, 블로그 http://ooljiana.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성룡과 퀸을 좋아했었고 영화감독을 잠시 꿈꿨었던 날라리다. 애국심이 과해서 가끔 불끈하다 욕을 바가지로 먹는 아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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