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싱>에는 대략 세 가지의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우선은 장르 자체가 미스터리니 영화의 내용이 그러합니다. 나머지 두 가지는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관람을 하고 나오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부터 말해야겠군요. 그건 바로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 영화를 제작할 결심을 했을까?"라는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베니싱>은 시나리오와 연출을 모두 감안하더라도 허탈하기 짝이 없는 영화입니다. 특히 미완성이나 다름없는 무책임한 시나리오는 가히 충격적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만큼이라도 살린 브래드 앤더슨을 칭찬해주고 싶은 심정마저 생깁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베니싱>은 포스터를 전적으로 믿으셔도 좋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시는 분도 영화를 직접 보시면 아마 수긍하시게 될 겁니다. (그렇다고 극장으로 향하라며 부추기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다분히도 아니라 대놓고 묵시록적인 영화입니다. 이 말은 곧 종교적이라는 것과 이음동의어라는 것쯤은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요컨대 <베니싱>은 실의와 비탄에 빠진 자들에게 "모든 것이 다 신의 뜻이다"라는 말을 건네는 사람의 습성을 쏙 닮았습니다. 그만큼 무책임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럴 듯한 소재와 설정이 힘을 발휘하는 초반부는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일순간에 주변의 사람들이 죄다 사라지고 홀로 남겨진 주인공 루크. 정전인 줄로만 알았더니 배터리까지 방전이 되어 연락도, 이동도 할 수 없는 상황. 그리하여 어둠이 드리우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튀어나와 사람들을 데려갑니다. 다행히(?) 루크에게는 손전등이 있어 며칠을 이리저리 떠돌다 또 다른 생존자와 조우합니다. 기가 막히게도 그 중의 한 사람은 이런 상황과 딱 들어맞는 이야기를 책에서 막 본 터라 한데 모인 사람들에게 말해줍니다. '크로아톤'에 얽힌 이야기를 말입니다.

이것만 보면 제법 흥미진진합니다. 예고편에 이끌려 <베니싱>을 본다 해도 전혀 무리는 아니에요. 그러나 초반부터 논리와 설득력을 상실한, 아니 아예 관심도 없는 듯이 전개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안드로메다가 간절해집니다. 여기서 딱 한 가지만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분명 <베니싱>의 세상은 전기가 완전히 나가서 밤이 되면 암흑천지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 및 휴대전화의 배터리까지 모두 쓸 수 없는 상태인데, 희한하게도 손전등에 필요한 건전지만은 멀쩡합니다. 혹시 화학성분을 가려서 불빛을 앗아가는 걸까요? (전공자 여러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합니다)

대충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극의 전반을 수놓고 있으니 갈수록 흥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테면 <베니싱>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억지스런 설정을 군데군데 마음대로 갖다 붙이고 있습니다. 그것도 마지막까지 '종교적'이라는 것을 면죄부로 내세우면서 깊은 고민 없이 얼버무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런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굳이 영화를 제작할 결심을 했으니 정말 미스터리한 일이죠. 적어도 <해프닝>도 이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 ↑ 이 차는 또 어떻게 헤드라이트가 켜지는지 한번 맞춰보세요.
브래드 앤더슨이 용케 공포와 미스터리의 분위기를 살리긴 했지만, 그의 연출도 기대에 비하면 실망스럽긴 큰 차이가 없습니다. 위기상황을 묘사하려고 번번이 캐릭터를 넘어뜨리게 만드는 데 의존하다니... 다른 작품은 몰라도 <X 파일>의 뒤를 따르고자 했던 후계자 중에서 단연 돋보였던 <프린지>를 감안하면 <베니싱>은 졸작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같은 미스터리 장르라 하더라도 기본적인 논리와 과학을 기반으로 쌓아올린 <프린지>는 장르의 특성을 잘 살린 반면, 허무맹랑에 가까운 자세로 일관하는 <베니싱>은 한 편의 영화로 기능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세 가지의 미스터리 중 마지막 하나가 남았죠? <베니싱>은 북미에서 지난 2월 18일에 개봉했습니다. 헌데 블로그를 통해 꾸준히 박스 오피스 소식을 전해드렸음에도 <베니싱>에 대한 기억은 일절 없더군요. 왜 그런지 찾아봤더니 4주 동안 10개에도 못 미치는 극장에서 상영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흥행수입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무리 메이저에서 제작한 영화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초라했던 이유가 뭘까요? 브래드 앤더슨이 연출하고 헤이든 크리스텐슨, 탠디 뉴튼, 존 레귀자모라는 잘 알려진 배우들이 출연했음에도 말입니다. 이미 해답이 나온 것도 같긴 합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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