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의 눈>은 앞의 두 영화와 같으면서도 조금 다른 소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블링크, 디 아이>가 주인공이 시력을 회복한 후에 겪게 되는 이야기라면, 반대로 <줄리아의 눈>은 시력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았습니다. 물론 모든 장애가 그러하지만 특히 시각을 잃는 사람은 일상에서도 가장 큰 공포를 느끼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될 듯합니다. 일차원적으로 보자면 만물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곧 시각적으로 확인한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시각을 상실한 자가 겪는 고통은 외부세계와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시각을 잃은 후에 인식의 도구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청각입니다. <줄리아의 눈>에서 묘사하듯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소리가 들린다면 거기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식의 매커니즘에서 시각과 청각의 우선순위를 나누는 근거는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어떤 감정으로 엮여있는가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귀로 듣는 것보다는 눈으로 보는 것을 더 선호하기에 화상전화기가 발명된 것이겠죠. 또한 화상전화기의 탄생 후에 생긴 부작용 - 구속과 감시 - 도 인식에서 시각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앞서 시각장애를 어쭙잖게 논한 것은 <줄리아의 눈>이 그 특성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의 대부분이 차단된 공간을 무대로 삼는 것도 그렇지만, 우리가 시각 - 청각의 순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줄리아와 남편의 대화를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단순히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청각마저 기능하지 못한다면 시각장애인이 얼마나 큰 공포에 사로잡히는지를 훌륭하게 묘사합니다. 대표적으로 오프닝이 그렇습니다. <줄리아의 눈>은 자살에 이르는 사라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독특한 범인의 캐릭터를 잘 살려, 관객에게도 마치 시각장애인이 된 듯한 공포심을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오프닝 외에도 <줄리아의 눈>에는 시각장애인이라는 소재를 십분 활용하는 대목이 꽤 많습니다. 그 목적은 대부분 관객들에게도 제한적인 정보를 제공하여 시각장애를 가진 주인공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줄리아가 이식수술을 하고 언니의 집으로 돌아온 후부터는 주변인의 얼굴을 일절 보여주지 않기도 하죠. 보통 인식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판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인식의 대상이라면 판별의 기준은 얼굴이 됩니다. 따라서 화면을 보고 있긴 하지만 얼굴을 보지 못하니 실질적으로 관객의 입장은 줄리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범인과 줄리아&사라 그리고 제3자와 범인 사이에 얽힌 심리는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범인의 캐릭터를 구축하게 된 배경과 범행동기는 비교적 뚜렷합니다. 그에 반해 범인이 각 인물과의 관계에서 갖는 심리는 제각각이랄까요? 스포일러라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일관성이 부족해 보여 이 또한 설득력이 좀 떨어집니다. 아울러 <줄리아의 눈>에 숨겨진 이야기, 즉 범인이 누구이고 정체는 무엇인지 등이 담긴 결말부의 반전을 예측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
덧) 인명의 표기방식은 통일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한문은 한글식 한자음이 아니라 거의 원어 발음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연걸은 리렌제, 장백지는 장바이쯔 등. 근데 희한하게도 영어는 한글식 발음을 고집합니다. <해리 포터>의 '헤르미온느'는 '허마이어니'에 가까운데 말입니다. '오렌지'를 '어륀지'라고 발음해야 한다며 영어를 추앙하는 나라가 남의 이름은 왜 함부로 막 바꾸나 모르겠군요. 심지어 <줄리아의 눈>은 스페인 영화라 '줄리아'가 아닌 '훌리아'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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