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혜인 기자] “일본에서는 기자가 회사에 들어가면 종업원이 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한다. 그래서 조직에 저항하거나 연대 성명을 내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일 언론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 인권 관련 토론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홋카이도 신문 기자는 이같이 말했다.

일본에서는 최근 ‘미투 운동’, ‘위드유’가 전파되고 있다. 성폭력에 침묵해온 일본 기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25일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주최한 ‘2019 한일언론노동자 심포지엄’에서는 도쿄신문, 홋카이도 신문 기자들이 참석해 일본 내에 벌어지는 ‘미투운동’을 설명했다.

25일 MBC골든마우스홀에서 열린 '2019한일언론노동자심포지엄'에서는 첫번째 세션으로 '여성인권과 언론노동자의 역할'을 주제로 다뤘다. (사진=미디어스)

일본은 여성 성폭력 문제에 있어 오랜 기간 침묵해왔다. 하세가와 아야 홋카이도 신문 기자는 “1991년 위안부 존재를 처음 알린 김학순 씨를 인터뷰를 한 우에무라 다카시상 전 기자와 보도를 일본 언론들은 일관적으로 무시하며 날조라고 공격했다. 이를 보도한 아사히 신문이 2014년에 ‘위안부’를 ‘여성 정신대’라고 표현했다고 수정 보도를 하자 일본 법원이 이를 근거로 아사히 신문 기사가 날조했다고 후퇴한 판결을 내렸다”고 말했다.

당시 모 신문사 편집장은 ”아사히 신문 몸에 불이 붙어 난리 났는데 우리까지 참여할 순 없다“며 우에무라 기자의 보도 논란에 참전하지 말자는 취지의 발언을 했을 만큼, 일본의 대다수 언론이 우에무라 기자에 대한 공격에 침묵했다고 하세가와 아야 홋카이도 신문 기자는 전했다.

일본 언론이 침묵한 사례는 위안부 김학순 씨 증언만이 아니었다. 2017년 5월 잡지 ‘주간신조’ 보도에 따르면, 현재는 언론인이지만 당시 여학생이었던 이토시호 씨가 TBS 기자에게 성폭력을 당했고, 경찰이 용의자를 체포하기 위해 나리타 공항에 나갔지만 체포 직전 영장이 취소되는 일이 있었다.

하세가와 기자는 “그 TBS 기자는 아베 총리와 함께 골프 칠 정도로 매우 가깝다. 이런 사람이 저지른 범죄를 정권의 힘으로 지우려 한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일본 언론은 보도하지 않았다”며 “4개월이 지나서야 피해자가 얼굴을 공개하고 기자회견을 하자 보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018년 4월 20일 검은색 옷으로 차려 입은 일본 야당 여성 의원들이 '#미투'라는 손팻말을 들고 재무성을 방문해 후쿠다 준이치 전 사무차관의 여기자 성희롱 사건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출처= 도쿄-교도 연합뉴스)

일본 내의 ‘미투운동’을 촉발시킨 건 지난해 발생한 TV아사히 기자 성희롱 사건이다. 일본 주간지 ‘슈칸신조’는 후쿠다 준이치 전 재무성 사무차관이 TV아사히 기자를 성희롱했다고 보도했다.

TV아사히 소속 여기자는 여러 차례 후쿠다 전 차관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해 지난해 4월 해당 발언을 녹음했지만 TV아사히 측은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기자는 해당 내용을 타사인 주간지에 제보했고 해당 내용이 알려졌다. 하세가와는 “일본에서는 기자가 회사에 들어가면 회사의 종업원이 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한다. 그래서 조직에 저항하거나 개인이 연대 성명을 내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자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5월 언론에서 일하고 있는 31개사의 81명의 기자들이 모여 ‘여성 네트워크’를 창립했다. “우리 자신이 목소리 없는 목소리의 당사자”라는 설립 취지를 내세웠다.

영화 ‘신문기자’의 원작자인 모치즈키 이소코 도쿄신문기자는 “저도 40대 기자가 됐고 여러 중요한 취재를 하기 위해 성희롱을 견뎌왔다. 하지만 10년 아래 TV아사히 여성 기자가 기자가 아닌 호스티스 취급을 받은 것에 대해 목소리를 함께 냈다”며 “이후 취재 환경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전 재무성 사무차관 성희롱 사건 이후 대처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카오리 사카이 출판노련위원장이자 MIC 부의장은 “저는 처음에 남성 그라비아 잡지에 입사했다. 당시 첫 인터뷰 대상자가 표지 모델이었던 여성이었다. 그때 저는 ‘노’라고 얘기하는 법을 몰랐고, 만약 얘기할 수 있었다면 지금 기자를 둘러싼 성폭력 문제는 일본에서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카오리 부의장이 읽은 TV아사히 신문 기자의 호소문에는 “동료나 선배, 상사에게 제가 받은 피해를 얘기해도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말라고 했고 침묵했다”며 “하지만 건전한 저널리즘 조직으로 존속하기 위해 사회는 가장 최우선에 여성 저널리스트들의 인권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MIC가 최근 일본 내 여성 언론인들의 성폭력 피해 실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일본의 여성 언론 노동자들의 74%는 성 문제와 관련해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고 답했다. 특히 기자 성폭력의 가해자는 정치인, 국가 공무원, 지방 공무원 등이었고 2차 피해를 본 사실도 확인됐다.

이에 카오리 부의장은 여러 대안책을 마련하고 있다며 “언론사 사장이 성과 관련된 제보를 받고 2차 피해를 당한 구성원이 있다면 문제를 해결하라는 성명서에 사인하게 하는 등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말했다.

이날 일본보다 앞서 미투 운동이 촉발됐던 한국에서는 한겨레, KBS 등이 모범 사례로 소개됐다.

언론사 최초로 ‘성평등센터를 설립한 KBS는 지난 4월 성평등 규정을 제정했다. 콘텐츠에 성인지 감수성이 반영되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모니터링할 수 있는 권한을 성평등센터에 부여했다. 이윤상 KBS성평등센터장은 “KBS의 성희롱 대응 매뉴얼 발표가 막바지 단계”라며 “인원 및 관리자 대상 교육을 강화했고, 신입사원 연수 프로그램에 성폭력 예방 프로그램을 포함시키고 있다. 일본에도 해당 사례가 공유되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지선 한겨레 젠더데스크는 “흔히 젠더 이슈 관련 보도를 할 때면 여기자를 앞세우거나 ‘잘 모른다’며 빠지는 풍토가 있는데 이를 젠더데스크가 홀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 젠더감수성이 높은 이들을 모으는 방식을 택했다”고 말했다.

한겨레 편집국에는 젠더이슈만 다루는 기자가 한 명 있고, 젠더 문제에 관심이 많은 기자들이 모인 ‘페미라이터’, 10년차 이하 기자들 중 젠더이슈에 관심이 많은 ‘레드위원회 여성분과’ 등이 있다. 최근 편집국장 투표가 이뤄지기 전에 관리직군에 여기자를 50% 정도 임명할 것을 요구한 덕분에 30% 가까이 선에 맞춰 합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유리 언론노동조합 정책차장은 “언론사에서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노사간에 활발한 노력을 하고 있다”며 “KBS, EBS, SBS 등은 언론사내 비정규직 피해자들도 신고할 수 있고 징계할 수 있게 사규를 만들었다. 취재 과정에서 성희롱을 당하게 되는 경우 회사의 책임을 명시한 단협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피해자의 심리상담 지원과 오프라인 예방 교육도 이뤄지고 있고 성폭력 피해가 발생했을 때 심리상담 비용을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조항도 최근 MBC에서 체결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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