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히어로는 시대를 막론하는 이야기 소재지만, 이 시대에는 미국의 히어로 영화와 일본의 소년 만화가 대세다. 그러나 두 히어로는 질적으로 다르다.

미국의 히어로는 자경단이다. 공권력과 병존하는 상태로 공권력의 빈틈을 메우거나, 공권력을 대행해 공동체를 지킨다. 이것이 히어로의 존재 목적이고, 치안 활동을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데서 역할을 얻는다. 이 점에서 미국형 히어로는 직업인의 성격이 있다.

일본의 히어로는 장인이다. 그들은 기능의 극한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소년 만화는 배틀 물의 뼈대를 지닌다. 더 강한 힘을 추구하는 '무의 도'가 기본이고, 해적과 닌자, 운동선수 같은 또 다른 기능적 정체성을 타고 장르가 변주된다. ‘미스터 초밥왕’, ‘중화 일미’ 같은 요리 만화조차 그렇다. 요리의 도를 닦으며 최고의 요리사가 되겠다는 미션 아래 ‘요리 배틀’이 진행된다. 공권력의 존재는 사라지거나 흔적으로만 남고, 도를 추구하는 개인의 세계가 가장 중요해진다. 공동체를 지키는 것은 개인의 도와 결부되는 또 다른 테마에 머문다.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포스터

한편, 일본의 히어로는 소년이고 미국의 히어로는 뮤턴트다. 일본의 히어로가 도의 입구에서 성장해가는 존재라면, 미국의 히어로는 어떤 계기로 다시 태어나거나 이질적인 생명체로서 단번에 강함을 획득한 존재다. 소년 만화의 엔딩이 곧 미국 히어로물의 오프닝인 것이다. 미국형 히어로는 히어로의 정체성을 획득한 상태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일본형 히어로는 단계적으로 스테이지를 밟으며 엔딩에 이르러 영웅으로 공인된다. 이 점에서 미국형 히어로와 일본형 히어로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상을 양분한다.

나루토와 루피는 호카게와 해적왕이 되기 위한 여정으로서 율리시스의 모험을 치르고, 울버린과 사이클롭스는 ‘남들과 다른 정체성’ 때문에 내면적 갈등과 공동체와의 불화에 휘말리며 오이디푸스의 비극에 빠진다. 이것은 공권력과 갈등 관계에 놓인 자경단의 정체성에서 오는 필연이며, 미국형 히어로물 특유의 심리 드라마적 성격 또한 여기서 비롯한다. 이런 차이로 인해 소년 만화는 선형적 플롯을 취하는 한 편의 이야기가 되고, 미국 히어로물은 여러 편의 작품이 한 데 엮여 세계관을 이루는 데서 맴도는 순환적 이야기가 된다. 성장하는 히어로와 완성된 히어로라는 차이에는, 세계화 후발주자로서 강대국을 지향해 온 일본과 최강대국으로서 이미 그 자체가 세계인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이 스며있을지도 모르겠다.

‘히로아카’와 ‘원펀맨’은 현재 일본 코믹스 계에서 대표적인 히어로물이다. 두 만화의 소재는 모두 히어로이며, 작풍 등에서 미국형 히어로물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두 만화가 정말로 새로운 점은 일본적 히어로의 전형에서 한 발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전통적인 기능인 모델에서 공동체를 수호하는 일상적 활동이 메인 테마인 자경단 모델, 직업인 모델로 이행했다. ‘히로아카’의 히로아카는 히어로를 양성하는 아카데미이며, ‘원펀맨’에는 히어로 협회를 통해 일감을 받고 승진하는 직업 세계가 구축돼있다. 또한 ‘원펀맨’에는 특수한 계기를 거쳐 괴인으로 거듭난 ‘뮤턴트’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사이타마는 이야기 오프닝부터 더 다다를 곳 없는 절대 강자로 설정돼있는데, 그 까닭이 ‘리미터’란 속성을 해제한 ‘변태’란 점 역시 미국적인 설정이다. 두 만화는 미국형 히어로 콘셉트의 흡수를 넘어 이런 구조적 설정에서 탈일본적 히어로물의 경계에 있다.

『원펀맨(ONE PUNCH MAN)』제1권. 표지/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僕ぼくのヒーローアカデミア) 표지

일본의 서브컬처는 원래부터 미국의 문화 콘텐츠를 흡수하며 성장했다. 일본의 문화평론가 아즈마 히로키는 오타쿠계 문화의 기원이 2차 대전 후 50년대부터 수입된 미국산 서브컬처이며, 일본 서브컬처의 역사는 미국의 서브컬처를 로컬라이징 한 역사라고 말한다. 90년대 소년만화의 양대 산맥 ‘드래곤볼’과 ‘슬램덩크’ 역시, 서브컬처가 아닌 대중문화이긴 하지만, ‘슈퍼맨’과 NBA 리그라는 레퍼런스를 미국에서 빌려왔었다. 다만, ‘원펀맨’과 ‘히로아카’는 미국과 일본의 문화 콘텐츠가 영향을 주고받는 흐름의 또 다른 세부 국면을 반영하고 있을지 모른다. 미국의 레퍼런스를 흡수하는 것을 넘어 그렇게 제작한 콘텐츠를 서구에 대량 수출하던 ‘드래곤볼’, 해적왕이라는 서구적 도상을 일본식 세계관을 통해 재현하거나 닌자라는 일본적 도상에 서구적 판타지물의 콘셉트와 스케일을 가미하던 ‘원나블’ 시대의 영광이 저물었고,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가 글로벌 문화 콘텐츠의 트렌드를 쥔 시대가 왔다. 그리고 미국의 히어로를 소비하며 20대를 보냈을지 모를 새로운 세대의 일본 만화가들이 콘텐츠의 뼈대를 수입해 이전과 또 다른 방식으로 로컬라이징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서구를 모방해 ‘작은 서구’를 구축해 온 현대 일본의 산업 역사를 유비해주는 것도 같다. ‘엑스맨’과 ‘어벤저스’ ‘데드풀’ ‘스파이더맨’ 등 거대한 이야기 인프라로 세워진 마블 유니버스가 ‘원펀맨’과 ‘히로아카’에선 한 편의 이야기 안에 축소된 세계관으로 이식돼있다. 마치, 소니와 닛산이 개발했던 소형 오디오와 소형 자동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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