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2007년 2월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일 때 "나중에" 사건이 있었다. 한 성소수자가 후보자의 연설 도중에 끼어들어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구호를 외치자 청중들이 그를 향해 "나중에"를 연호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닷페이스>의 편집된 영상으로 널리 퍼졌다. 이때 인권 진영이 이 말을 성소수자 인권은 나중에 챙기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강하게 비판했고, 그러자 문 후보의 지지자들은 당시 전체 영상을 가져와 "연설이 끝난 뒤 질문 시간이 마련돼 있으니 그때 발언하라는 취지"라고 적극적으로 방어했다.

그 후 2년 9개월이 지났다. 당시 '나중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한 쪽이 어느 쪽이었는지를 이제 우리는 안다. 오해한 쪽이 오히려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었다. 문재인 대통령 본인을 포함해 헌법재판관(이유정, 이은애), 장관 지명자(박성진, 정현백, 조국) 등의 인사청문회 대상자들은 각지에서 똑같은 말을 매뉴얼처럼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동성애는 개인의 성적지향이므로 반대할 수 없으나 동성혼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13일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주최로 '동성혼, 파트너십 권리를 위한 성소수자 집단진정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또한 당시 '나중에'가 그 의미가 아니라고 항변하던 사람들은 지금 정확히 그 의미로 동성혼 등 인권 이슈에 대해 '나중에'를 외치고 있다. 특히 조국 전 장관 사태 이후로 그들에게는 오직 '검찰 개혁'만이 지금의 이슈가 되어버린 나머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주52시간제 등과 같이 문재인 정부가 앞장서서 외쳤던 정책들에 대해서까지 '나중에'를 외치고 있는 풍경은 제법 의미심장해 보인다.

다시 사회적 합의로 돌아오면, 민주주의자의 관점에서 사회적 합의는 한 사회의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다. 공론의 노력이나 일정한 사회적 합의 없이 입법자들의 의지와 정치력으로 제도를 개선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개선된 제도는 시민들의 합의 수준에 따라 언제든 원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모래성과 같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뒤 1970년대 이후로 줄곧 합법이었던 임신중절수술(낙태)이 주 단위에서 불법화되는 흐름이나, 기후변화를 멈추겠다는 의지로 맺어진 파리협정에서 미국이 탈퇴한 사건은 사회적 합의 없는 제도 변화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지나칠 정도로 끔찍하게 보여준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런 것일 테다.

"인권은 합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동성혼 지지 구호에 심정적으로 공감하면서도 결국 고개를 젓게 되는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인권 역시 역사적, 사회적으로 합의의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따라서 동등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 인권의 개념이다. 지금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 개념은 근대 철학자들에 의해 '고안'되기 시작했으며,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기에 이르러서야 사회적으로 '선언'된 것이다. 이후에도 그 개념을 무너뜨리기 위한 반동의 시도들이 있었으나, 결국 인권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데, 그 말이 늘 공허한 논평에 그치고 만다는 점이다. 한국 정치 지형에서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 막대한 권력과 권한을 갖고 있으며 사실상 사회 변화를 주도하는 것을 주된 사명으로 한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단순히 논평자의 위치가 아니라 어떤 의제가 사회적 합의에 이르도록 여론을 조직하고 정치를 펼치는 행위자의 위치에서 발언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에서 '국민이 묻는다, 2019 국민과의 대화'를 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지난 19일 문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서 또 다시 "동성혼은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않았다"고 발언한 직후 더불어민주당 성소수자위원회 준비모임에서 발표한 입장문은 이 점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사회적 합의가 정말 중요하다면, 그 합의를 어떻게 이끌지 밝히는 것 역시 차별받는 국민이 없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는 정부와 정당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사회적 합의에 이르도록 하는 정치의 역할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정부 들어서 가동된 두 차례의 공론화위원회가 좋은 예다. 신규 원전 건설을 중단하겠다는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했고, 정시 비중 확대에 대한 여론이 높아지자 '대입제도개편 공론화위원회'를 가동한 것이다. 물론 두 위원회가 다다른 결론이 문재인 정부의 공약 및 정책방향과 충돌하긴 했지만, 여기서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방법을 알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2018년 2월, 북한 김여정 특사가 방북을 제안했을 때 문 대통령이 "여건을 만들어서 성사시키자"고 화답했던 멋진 말을 기억한다. 문 대통령은 기어이 ‘여건을 만들어’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이는 문재인 정부 최대의 성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여건이 되면'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여건을 만들어서' 해내는 것, 그것이 정치의 본령이다. 문재인 정부가 동성혼 합법화의 여건을 만들어나가는 첫 정부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하고 바란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