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축구 공격수 가운데서 가장 굴곡이 많았던 선수를 꼽으라면 바로 황선홍 포항 스틸러스 감독을 꼽고 싶습니다. 10년 넘게 한국 축구 공격을 이끌었지만 잦은 부상과 불운으로 가장 많은 비판, 비난을 받으며 '비운의 선수'로 추락할 뻔 했었지요. 하지만 '마지막 월드컵'이었던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그야말로 높이 떠오르면서 팬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고 현역에서 물러나고 당당히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운명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선홍 감독 이후 그의 계보를 잇는다는 대부분의 자원들이 굴곡 있는 선수 생활을 해 왔습니다. 안정환, 설기현, 조재진, 박주영 역시 중요한 순간마다 쾌거와 아픔을 동시에 맛봤고 이 가운데 조재진은 결국 은퇴를 선언해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지만 반면에 활발한 몸놀림을 과시하며 골을 뽑아내야 하는 부담감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 유독 우리나라 공격수들의 선수 인생은 비슷한 점이 많은 듯합니다.

그러나 여러 공격수들 가운데서도 '라이언킹' 이동국만큼 굴곡이 심했던 선수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초창기에 그는 황선홍 감독과 한솥밥을 먹으면서 패기 넘치는 플레이로 데뷔해부터 강한 인상을 남기며 신인상까지 수상하는 등 한국 축구 공격의 대들보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후 황선홍 감독 못지않은 굴곡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상당히 힘들게 선수 생활을 이어왔습니다. 잦은 부상, 부진, 그리고 해외 진출 실패까지 정말 산전수전을 다 겪었습니다. 겨우 다시 일어서는가 했지만 지난해 그토록 바랐던 월드컵 출전을 이루고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해 또 한 번 아픔을 맛봤습니다. 남아공월드컵 16강전 후반 42분에 날린 회심의 슈팅이 힘없이 데굴데굴 굴러간 모습이 이동국의 현재 모습을 보여준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습니다.

▲ 100호골을 넣은 뒤 담담히 골세레모니를 펼치는 이동국 ⓒ연합뉴스
그래도 그는 어려운 시기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K리그 프로 데뷔 13년 만인 2011년 3월 20일, 이동국은 K리그에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우성용, 김도훈, 김현석, 샤샤, 윤상철에 이어 6번째로 K리그에서 100골을 넣은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골을 넣은 뒤 담담한 골세레모니를 펼쳤지만 그 어떤 골보다도 참 멋지고 의미 있는 득점을 기록하면서 조용히 힘차게 포효했습니다.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이동국의 축구 선수 인생은 정말 '롤러코스터'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굴곡이 심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다양한 경험이 위기 순간마다 이동국을 다 잡는 계기가 됐고,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그리고 K리그 출전 252경기 만에 100골을 넣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고생 끝에 낙이 온' 것입니다.

이동국의 시작은 화려함 그 자체였습니다. 데뷔 첫 해인 1998년, 무려 11골이나 폭발시키면서 신인상을 수상하고 프랑스월드컵에도 출전해 '무서운 신예'로 떠올랐습니다.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날카로운 슈팅을 날린 장면은 0-5로 무참히 깨지고 있던 한국 축구에 한 줄기 희망의 빛과도 같았습니다. 경기장 안팎의 인기도 대단해 K리그의 중흥을 이끈다는 평가까지 받으며 '르네상스'를 일으킨 주역으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에 접어들어 이동국의 선수 생활은 '상당히' 순탄치 못했습니다. 2000년 독일 분데스리가 베르더 브레멘에 임대돼 유럽 진출의 꿈을 이뤘지만 제 기량 한 번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다시 들어와 첫 번째 쓴 맛을 봤습니다. 그리고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최종엔트리에 탈락하는 불운을 맛보며 '4강 신화'의 그 순간을 함께 즐기지도 못했습니다. 병역 혜택, 그리고 월드컵 때 뛰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사력을 다했지만 결국 목표했던 금메달 획득에 실패하며 고개를 또 한 번 떨궜습니다. 이 순간들이 이동국에게는 매우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다행히 이동국은 군 생활을 하면서 분위기 반전을 모색했습니다. 평생을 함께 할 반려자도 찾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 그동안 못 다한 활약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논스톱 발리슈팅은 그의 전매특허로 떠올랐고, 강력해진 골결정력은 '공격수 부족'으로 처질 뻔한 한국 축구에 새로운 힘이 됐습니다. 그를 주목하는 눈빛은 다시 많아졌고 20대 후반에 새로운 희망이 떠오르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불운이 이동국을 덮쳤습니다. 2006년 4월, 독일월드컵 개막 2달 전에 가진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K리그 경기에서 무릎 전방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중상을 입으며 월드컵 출전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겨우 6개월 만에 몸을 만들면서 조금씩 살아났고 그 덕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미들스브러에 입단하는 꿈을 이뤘지만 이곳에서도 이동국은 현지 적응에 실패하고 이렇다 할 강점을 보여주지 못하며 1년 만에 다시 국내로 들어와야만 했습니다. 또 2007년에는 아시안컵 음주 파문으로 대표 자격 정지 처분을 당하는 수모도 겪었습니다. 성남 일화에서 13경기를 뛰면서 2골에 그치는 빈약한 모습을 보여줬을 때만 해도 '이동국에게 희망은 없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 전매특허 발리슛을 날리는 이동국 ⓒ연합뉴스
그런 가운데서 이동국은 '최후의 도전'과 같은 마음으로 새 둥지 전북 현대에서 명예 회복을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 전략은 맞아 떨어졌습니다. 2009년 한 해를 자신의 해로 만들면서 또 한 번 기적 같은 재기를 이뤄낸 것입니다. 32경기에 출전해 22골을 집어넣으면서 생애 첫 득점왕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팀 우승에 크게 기여하면서 첫 MVP 수상이라는 쾌거도 이뤘습니다. 10년 동안 이루지 못했던 것을 다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만큼 이동국의 2009년은 그야말로 화려함 그 자체였습니다. 대표팀에도 2년 여 만에 복귀해 서서히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월드컵 출전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월드컵 본선 직전에 컨디션 난조로 이동국은 최종 엔트리에 당당히 들고도 정작 본선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며 홀로 고개를 떨궈야 했습니다. 특히 16강전 우루과이전에서 후반 42분에 회심의 슈팅을 날렸지만 골문을 통과하기 직전에 상대 수비수가 걷어내면서 '뭔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월드컵에서의 아쉬운 활약, 그리고 전년도보다 다소 떨어진 경기력 때문에 또다시 내리막길을 걷는 것 아니냐는 말이 다시 불거져 나왔습니다.

그래도 이동국은 기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칼을 갈면서 다시 일어서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보란듯이 개막한 지 3경기 만에, 그것도 한 경기에 2골을 몰아넣으며 대기록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골도 넣고 팀의 대승도 이끌면서 이동국의 기쁨은 그야말로 2배였습니다.

굴곡 많았던 선수 인생 속에서도 그는 공격수가 해내야 하는 역할인 골을 꾸준하게 넣어왔고 할 일은 꾸준하게 했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몸소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그는 담당하게 골 기록을 세운 뒤에 우성용이 갖고 있는 116골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앞으로 16골을 더 넣어야 하기에 또 언제 시련이 이동국의 앞을 막을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는 이동국이었기에 기록 달성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선수 생활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는 시점에서 뭔가 큰 일을 저지르고 그래도 '유종의 미'를 거두며 떠나고 싶어 하는 이동국. 그의 힘찬 도전은 K리그, 그리고 한국 축구에 새로운 역사, 그리고 큰 의미, 족적을 남기는 계기로 이어질 것입니다. 힘든 시기를 많이 겪었어도 마지막만큼은 정말 환하게 웃는 이동국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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