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이 무너졌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정치권에서는 치열한 책임공방이 오갔다. 한나라당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책임을 돌렸고, 대통합민주신당에서는 이명박 당선자와 한나라당이 장악한 지방정부를 겨냥했다.

어느 쪽에 더 책임을 물어야 할지, 현재로서는 정밀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논리적 정합성만을 따진다면 이명박 당선자 쪽 책임이 더 크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일반인이 마음대로 숭례문에 접근하도록 만든 사람이 이 당선자였기 때문이다.

이 당선자가 숭례문 화재 사건에 대해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 눈길이 간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당선자가 마침내 오늘 숭례문 화재 사건에 대한 입장을 내놓았다. 국민들의 성금으로 숭례문을 복원하자는 것이다. 그게 다였다.

▲ 문화일보 2월12일자 1면.
한숨이 나왔다. 당장 성금 모금을 실시한다면 나는 돈을 낼 생각이 없다. 일단 숭례문 복원 작업이 국민들의 성금으로 진행할 사업인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왜 성금을 내야 할까. 이 당선자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 예산보다는 오히려 국민이 십시일반 참여하는 성금으로 복원하는 것이 오히려 국민들에게도 위안이 되지 않겠느냐.”

국민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방법으로 모금을 제안했다. 감성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당선자가 말이다.

시민단체에서 성금 모금을 하자고 나선다면 동의하기는 어려워도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자라면 사태의 원인 파악과 대책 마련에 대한 이성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먼저다. 얼마나 깊은 고민 끝에 국민 성금 모금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는지 모르겠다.

정권 차원에서 국민들에게 성금을 내라고 독려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과거 정권이 국민성금 모금이라는 행위를 어떻게 악용했는지에 대해 이 당선자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개인적 기억으로는 두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이른바 ‘평화의 댐’이라는 대국민 사기극에 걸려들어 어린 시절 가뜩이나 가벼운 호주머니를 털렸던 기억이다. 두 번째는 비슷한 시기 천안 독립기념관을 짓겠다며 또 한번 온국민을 대상으로 성금을 걷은 것이다. 이때도 한참 용돈이 궁하던 시절이었지만 성금을 내는 것은 ‘의무사항’이라는 서슬에 눌려 돼지 한 마리를 학살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독립기념관을 지은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훗날 그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치장되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깬다’.

지금 나이 30대 중반 이후의 세대라면 정권 차원의 국민성금 모금에 대해 분명 이런 장면부터 떠오를 것 같다.

▲ 한국일보 2월12일자 3면.
게다가 숭례문 화재는 좀더 조사해봐야겠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관계만 종합한다면 전형적인 ‘인재’에 해당한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해 숭례문이 무너진 것이다. 그게 정말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의 주장처럼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마을에 정성을 쏟느라 남대문을 돌보지 못했기 때문인지, 이명박 당선자가 서울시장 재직 시절 인기 영합 차원에서 아무런 대책없이 숭례문을 일반에 개방한 탓인지는 좀더 따져볼 문제다.

책임이 어느 쪽에 더 쏠리든, 숭례문 화재는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정부의 책임이다. 정부가 미숙해서 저지른 ‘인재’에 대해 국민들이 왜 성금을 내야 할까. 대통령 당선자와 정부는 사건의 조속한 해결과 재발방지를 위한 합리적인 대책을 내놓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국민들이 성금을 모으든 재산을 갹출하든, 그것은 대통령 당선자가 아니라 국민들이 합의해서 국민들이 결정할 몫이다. 이 당선자가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친 다음에 말이다. 복구비용에 정 마음이 쓰인다면 이 당선자가 대선 기간에 약속했던 거액의 재산 헌납 약속을 이번 기회에 이행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사족-이명박 당선자의 말 한마디에 대불공단의 전봇대가 쑥 뽑혔다. 화재 발생사실에 대해 이 당선자도 분명 보고를 받았을 텐데, “그거 기왓장 좀 들어내고 진화해보지.” 한마디 했으면 어떨까. 소방방재청과 문화재청의 기왓장 타령을 보고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최성진은 현재 한겨레21 정치팀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때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방송작가 생활을 경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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