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호성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 이후, 조선일보의 지면은 '환호성'이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 듯하다.

SBS가 단독보도했던 '장자연 자필 편지'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진 다음날인 오늘(17일), 조선일보는 관련 기사를 1면, 12면, 13면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사설까지 썼다.

"SBS는 10일간 30여차례 오보하고도 어제 뉴스 끝날때 형식적으로 유감표명했다" "전모씨는 특수강도강간죄로 복역 중인 전과 10범이다. (과대망상증 환자인) 이런 인물이 주장하는 내용이라면 아무리 솔깃하더라도 철저한 검증을 거치는 것이 언론의 상식이다"며 SBS를 근엄하게(?) 꾸짖는 보도가 대부분이다.

▲ 17일자 조선일보 13면
"선진국 언론이라면 경영진이 사퇴할 일"이라고도 했으며, 사설에서는 "검찰이 2009년 8월 경찰의 이 사건 수사기록에 토대해 작성한 사건처리 결정문에 일부 정치인과 인터넷 유언비어가 조선일보 사장이라고 공격한 인물이 사실은 다른 인물임을 그 사람의 실명을 들어 명기하고 있는데도, 이 기록을 확인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 일부 정치인과 일부 언론은 이번 가짜 편지를 빌미 삼아 이념적 편향으로 혹은 조선일보 공격의 반사적 이익에 편승하려고 본사에 대한 직접적·간접적 명예훼손 행위를 그치지 않았다"며 색깔론까지 거론했다.

#. 그리고 뒷조사?

장자연 사건을 2년만에 재점화시킨 SBS가 '괘씸'하기는 했나보다. 때는 바야흐로 16일 오후. 국과수의 장자연 편지 발표에 이어 경찰의 "재수사 않겠다"는 발표가 있은 직후였다. 미디어스 사무실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조선일보 기자였다.

"저는 조선일보의 OOO기자입니다. 곽상아 기자 있나요?"
"본인입니다."
"지난번에 쓰신 SBS 주주 총회랑 SBS 주주 익명 인터뷰 기사 때문에 전화드렸는데 찾아뵈도 될까요?"
"오늘은 시간이 안 됩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나요?"
"아 그래요…. 혹시 그때 쓰신 SBS 익명 주주 분을 연결받을 수 있을까요?"

조선일보 기자가 지목한 기사는 <SBS 주주들 "주가 반토막" "지주회사 회의감" 아우성> <"태영건설, SBS 소유해선 안 돼">. 둘다 SBS 지주회사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의견이 주요하게 다뤄진 기사다. 그런데 갑자기 조선일보가 왜 SBS 지배구조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일까? 그것도 SBS의 단독보도로 장자연 사건이 재점화돼 한창 심기가 불편하실 조선일보께서? 참으로 생뚱맞은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수상쩍은 냄새가 폴폴 풍겼다.

"그동안 조선일보가 SBS 지배구조 문제에 대해 기사화한 적도 없었고,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왜 이 문제를 취재하나요? 장자연 사건과 관계가 있는 건가요?"
"그게…. 저는 일선 기자라서 잘 몰라요. (윗선에서) 오더를 받았어요. 세게. (여튼) 그때 쓰신 익명 주주분 좀 연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OOO기자의 답변에, 솔직히 조금 놀랐다. SBS 주주를 취재하게 된 경위에 대해 그럴 듯하게 뭐라도 말할 줄 예상했는데 '윗선의 오더'라는 말로 상황을 아주 명쾌하게 정리해줬기 때문이다.

SBS 지배구조에 대한 순수한 취재라 보기 어려운, '조선일보 윗선의 오더'에 내가 협조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익명으로 인터뷰했던 SBS 주주 A씨에게도 전화를 걸어 의사를 물으니 그도 "끼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연결되길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수상한 취재 배경, 인터뷰 당사자 본인의 부정적 의사 등을 종합할 때 조선일보에게 A씨를 연결시켜줄 수는 없었다. 조선일보 기자에게 '연결시켜줄 수 없다'고 말하고, 다시 내 할 일을 하고 있는데 또 전화가 걸려온다.

"지금 사무실 앞에 와 있는데, 잠깐만 뵐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시작된 것이다. 기자가 기자한테 '뻗치기' 당하는 어이없는 사건(?)이. 그는 절박해 보였다. 하지만 그 절박함은 SBS 지배구조 체제의 문제점을 파헤쳐 '건강한 SBS'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야 말겠다는 사명감(?) 보다는 '윗선의 오더'를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는 말단 기자로서의 절실함에 더 가까워 보였다. 조선일보 윗선은 SBS의 장자연 단독보도 배경에 대해 '조선일보를 겨냥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단다.

말단 기자로서의 고충 등 이런저런 사연을 듣던 도중, 그가 평소 SBS 사안에 대해 취재해온 바가 전혀 없음도 알게 됐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SBS 지주회사 전환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과 고민 등을 체감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작정 'SBS 주주를 연결해 달라'고 하니, 이런 막무가내가 또 어딨을까.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으니 그만 돌아가시라' '여기서 20시간 기다린다고 해도 소용없다'고 해도 떠나지 않는다. 오후 4시가 안돼 미디어스 사무실을 찾아왔던 그는 1시간 반 가량 '뻗치기' 하다가 수확없이 돌아갔다. 그리고, 저녁에도 내 휴대폰은 쉴새없이 울려댔다.

불순한 동기, 저돌적 취재 끝에 탄생될 기사는 과연 어떤 것일까. 정부 실책 눈 감아주기, 적당히 위협하기, MBC에 색깔 칠해 공격하기 등 온갖 드립 끝에 드디어 '방송'까지 손에 거머쥔 '대한민국 1등신문'의 추악한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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