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일 강원 춘천시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특별위원회 발대식'에 참석한 한나라당 강원도지사 예비후보들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최동규, 최흥집, 엄기영, 이호영 예후보.ⓒ 연합뉴스
남진의 ‘둥지’라는 노래가 있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마. 한눈팔지 마. 여기 둥지를 틀어. 지난날의 아픔은 잊어버려.” 좋다. “그 동안 몰랐지. 내 품에 둥지를 틀어 봐.” 죽인다. 노래처럼 이제야 당신 품에 둥지를 틀어 죄송하다고 했더라면 이 글은 없었다. 한나라당에 둥지 틀기로 최종적으로 마음먹어 행복하다거나, 든든한 둥지를 찾아들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더라도 마찬가지다.

보수여당 프리미엄이 붙은 둥지의 선택. 누구나 다 아는 일, 이미 선택한 행보다. 내가 왈가왈부하고 짜증낼 일이 아니다. 기회주의적으로 여기 둥지를 찾고, 변절해서 저기 둥지로 잽싸게 옮기며, 정체불명의 상태로 또 다른 둥지를 찾아 방황하는 모습에 놀랄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게 이 나라 정치 풍속도고 그게 정치가 집단의 속성이니, 뭐가 그리 한심할 수 있겠나? 이 땅의 제도정치는 곧 둥지트기지.

‘둥지’. ‘동우리’라는 우리말의 잘못된 표기라는 데, 우리가 일상에서 훨씬 자주 쓰는 말이다. 보금자리. ‘새가 알을 낳거나 깃들이는 곳’을 가리킨다. 참 깊은 뜻을 가진 단어다. 그런데 왜 그는 이 좋은 말을 택하지 않았을까?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한눈팔지 않고 한나라당에 둥지를 틀기로 했으니 봐 주시오.’ ‘이 곳에 확실히 자리를 잡고, 죽어라 열심히 뛰어 꼭 도지사라는 황금알을 낳고 정치가로 새로 태어날 테니 지켜봐 달라’고 했다면, 봐줄만 했지 않을까?

말했듯이, 둥지를 찾고 둥지를 옮기고 둥지를 바꾸고 하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정치가 무리의 일반 습속. ‘여러분이 가꾼 튼실한 둥지에서 새로 알을 깨고 나와 깃들도록 도와 달라’라고 읍소했더라도, 그렇거니 했을 것이다. 뭐랄 텐가? 이미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사람. 속내를 그렇게 솔직하게 까는 거지.

그게 폼 나고 멋진 정치지. 그렇게 하는 게 쿨한 정치가. 그랬더라면 지역 보수 정치인이 되기로 작심한 자의 당연한 행보로 봐주고 넘겼을 것이다. 그런가 싶어 살짝 보니, 그는 편하게 ‘둥지’라는 노래를 읊지 않았다. 대신에 어설프고 어색하게 ‘동지’론을 불쑥 꺼냈다. 준비한 발언인지 아님 무심코 내뱉은 단어인지 모르겠지만, 찰나의 일이지만, 기사를 접하는 사람의 시선을 당기고 의문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닭 살이 돋다’는 말은 이때 제격. 그 말 듣는 순간 당장 드는 게 민망함이고, 바로 따라오는 게 인상 찌푸려지는 불쾌며, 서서히 솟구치는 게 깊은 의구심이다. 그게 살길이면, 자기를 살펴줄 보수 정객들 앞에서 넙죽 절할 수 있다. 그게 갈 길이면, 지금까지 속 썩인 점, 진심으로 사과할 수도 있는 일. 뭘 그리 놀라는가? 다들 그렇게 하지 않소?

“그동안 강원도지사 출마 또 한나라당 입당, 이런 문제를 두고 여러 당원 동지 여러분께 속 썩여 드린 거 먼저 사과합니다.” 다 봐줄 수 있다. 하지만 눈에 거슬리고 마음에 걸리는 가시가 바로 저 속에 끼인 ‘동지’다. 동지. 뜻을 함께 함. 뜻을 함께 하는 자 혹은 같은 뜻을 지닌 자. 결코 쉽게 쓸 수 있는 말,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심지어 오랫동안 활동을 같이 하고 치열하게 행동에 참여할 경우라도 그럴 것이다. 의식을 나누고 의지를 다지는 일이 어찌 쉬운가? ‘동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관계가 아니다. 오랜 체험을 통해 다져지고 쌓일 때, 동무로서의 신뢰와 우애까지도 확인될 때, 그때도 어렵게 꺼내 쓰는 게 바로 ‘동지’라는 말이다. 평생 뜻을 함께 하는 사람에게 ‘동지’라고 말해 본 적이 얼마나 있으신가? 진보든 보수든, 우파든 좌파든 상관없이.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쭉 함께 하겠다는, 상대에 대한 결의의 표식이자 자신에 대한 단호한 약속의 표현. 옛날 같으면, 단지의 고통스런 의례를 통해 그 관계맺음의 의미를 확인했다. 그런 사이라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하는 게, 아니 그렇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함부로 쓰지 않는 게 동지라는 호칭. 과연 그만큼 오랜 신뢰관계가 쌓였고, 진짜 그토록 깊은 고심의 과정을 거쳤었나? 아님 그냥 기존 당원들에게 잘 보이려고 가져다 쓴 수사에 불과했나? 진지한 단어의 경박한 화용인 듯 해 민망과 불쾌의 감을 느끼면서, 서서히 드는 게 이런 의문인 것이다. 혹 진짜 동지는 아닐까? 그렇다면 대체 그는 언제부터 한나라당을, 현 정권을, 그 내부의 보수/수구/극우/신자유주의 복잡세력을 ‘동지’로 인정하고 있었나? 그와 집권세력 간 동지적 특수 관계는 언제 어떻게 다져진 것인가?

개인의 선택에 해당하는 둥지설과 다른 이 정치적 동지론은 그 내용과 궤적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무엇의 동지고, 언제부터 동지인가? 언제 어떻게 싹튼 동지 관계인가? “도지사 출마를 결정하고 한나라당 동지들과 함께 하겠다는 것은 1년에 걸친 고뇌의 결과”라는 말로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다.

중요한 정치적 선언이자 정치가적 발언에 관한 추가진술이 필요하다. 대체 한나라당과 함께 하는 뜻이 뭐고, 집권정당과의 긴밀한 교감 및 행동은 무엇을 기초로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그는 좀 더 정확히 설명할 의무가 있다. 한나라당이라는 공당의 도지사 후보가 되기로 결심했기에 그렇고, 무엇보다 바로 그 집권정당 하에서 온갖 고난을 겪고 있는 공영방송의 사장이던 자로서 그렇다. 상식을 위반한 MBC 참상의 핵심 당사자였기에 묻는 질문이다.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엄기영씨의 “고뇌의 결과” “한나라당 동지들과 함께 하겠다”는 발언은 더 이상 개인적 사견이 아니다. 중요한 공론 대상이고 진지한 토론 포인트다. 함부로 써서는 안 될 동지론의 정리, 반성 기회이기도 하다. 정치적 가치와 정당의 이념, 의식적인 실천의 문제다.

공인으로서, 정치가로서 진지하게 답해 보시라. 정치적으로 동지가 된다는 건 무슨 뜻인가? 당신에게 “한나라당 동지”란 누군가? 언제부터 맺어진 동지며, 영원히 함께 할 동지인가? 이 질문에 당당하게, 소신 분명하게 답할 용기가 있는가? 어떠신가? 한나라당에 둥지를 트는 것과 “한나라당 동지들과 함께 하겠다”는 말의 놀라운 의미차를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겠는가?

“동지는 간데 없”더라도 강고히 공영방송 MBC를 지키겠다는 이들을 멀리한 자가 반대쪽 무대에 올라 “동지”를 외치는 이 모순. 혼돈? 시대의 비극인지, 인간의 소극인지.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