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친구가 물었다. 알런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까. 말 7마리의 눈을 찌른 17세 소년 알런이 주인공인 연극 <에쿠우스>를 보고 나온 직후였다. 나는 대답했다. 알런은 잘 모르겠고 다이사트 박사는 스스로 생을 마감 했을 것 같아.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사트 박사는 알런의 범행동기를 파헤치는 정신과 의사다. 추석연휴를 마무리하던 날이었다.

가상인물의 미래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칠 수 있던 까닭은 당연히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 납득할 만한 완성도를 보여준 덕분이다. 하지만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만으로는 상상력 발동 조건으로 부족하다. 관객이 인물의 행동과 감정에 공명할 수 있는 충분한 출연분량이 주어져야 한다. <프로듀서101>를 예로 들어보자.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연습생이라도 카메라가 3초간 스치듯 안녕한다면 국민프로듀서들의 소중한 한 표를 받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영화 <암살>

같은 맥락에서 ’저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살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한국영화 속 인물은 남성인 경우가 대다수다. 여성 캐릭터의 출연분량이 적은 탓이다. 2004년부터 2018년까지 천만관객을 돌파한 한국영화는 15편. 이중에서 여성이 주연으로 극을 이끌어 간다고 할 만한 건 <암살>뿐이다. 가장 기본적인 성평등지표로 활용되는 벡델테스트*를 통과한 작품도 <도둑들>, <광해, 왕이 된 남자>, <해운대>, <괴물>, <국제시장>까지 5편 밖에 없다.(※벡델테스트 평가기준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두 명 이상 등장하는가 △이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가 △이들의 대화 내용이 남성과 관련 없는가)

기준을 넓혀 봐도 여성캐릭터가 홀대받는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영화진흥위원회 산하 한국영화성평등소위원회에서 올해 발표한 '한국영화산업 성평등 정책 수립을 위한 연구'에 따르면 10년간 전체 흥행순위 50위 영화 468편 중 여성 주연 영화의 비율은 네 편중 1편인 24.4%. 크레디트 등장인물 순서에 따른 주연 1과 주연 2가 모두 여성인 경우는 열편 중 한 편에도 못 미치는 8.3%에 불과했다. 영화감독도 6.2%에 불과하다고 한다.

영화 <기생충>의 기택 가족

올해 개봉한 국내의 블록버스터들을 떠올려보자.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 마지막까지 정서적 교류를 나누는 건 아들인 기우(최우식)이다. 물론 아버지를 받드는 모습이 작중에 여러 차례 표현되긴 했지만 ’어떤 사건‘ 이후 부인인 충숙(장혜진)의 존재감이 확연히 사라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엑시트>에서도 사촌까지 총출동하는 용남(조정석)의 가족과 달리 의주(임윤아)의 가족은 휴대폰을 통한 목소리 출연조차 없다. 지상파 방송사는 물론 유튜버까지 생중계에 뛰어든 국가적 재난상황인데도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 김보라 감독의 <벌새>의 선전이 반갑다. 두 작품은 그저 남성배우가 극을 이끌지 않는다거나,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귀여운 아이를 등장시키거나, 성별만 바꾼 얄팍한 상술로 기대감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허술한 작품이 아니다. 관객을 몰입시킬 탄탄한 연출로 억지로 잊고 살던 유년기의 콤플렉스를 들춰내고, 우주보다 크게 느껴지는 사춘기의 고민들을 보듬으며 관객의 굳게 닫힌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버린다. 그리고 장벽이 무너진 마음 한편에서 꾸준히 자라날 질문을 하나 심어 놓는다. ‘저 여성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라는.

영화 <우리집> 하나(김나연), 유미(김시아), 유진(주예림)

김보라 감독은 전작인 단편영화 <리코더 시험>을 본 관객들이 ’9살 은희가 앞으로 어떻게 자라날까요?‘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같은 세계관을 확장해보자는 생각에 <벌새>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영화제에 초청되고 서른 개를 훌쩍 넘긴 경이적인 수상 행보는 캐릭터를 마치 살아있는 아이처럼 대하던 관객의 물음에서부터 시작됐다. 1975년 초연 후 25년이 지난 2001년에 다이사트 박사로 캐스팅 된 여성인 박정자 배우는 최초의 '여성' 다이사트 캐스팅에 대해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끝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경력 30년을 훌쩍 넘긴 대배우의 단단한 고백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1919년 10월 27일. 종로 단성사에서 상영된 <의리적 구토>를 시작으로 한국영화는 올해 100주년을 맞이했다. 100주년을 기념하던 순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작품은 의미심장하게도 또 한 여성의 미래에 질문을 던지는 <82년생 김지영>이다. 지금까지 10편 중 9편을 제작해온 남성 제작자, 4편 중 3편을 이끌어온 남성 배우들은 다음 100년을 위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가. 설마 지금까지와 같은 고민에 멈춰서 있지는 않나. 진부한 질문에서 참신한 이야기는 탄생하지 않는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100년이 지금까지와 다른 질문에서 시작하길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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