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에 접어들며 한국 근현대사를 탐색하는 많은 영화들이 등장했고,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천만 관객시대를 열었다는 사실을 새삼 언급하지 않더라도, 2000년 1월 개봉한 <박하사탕>을 시작으로 화성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살인의 추억>, 유신시대의 학창시절을 회고한 <말죽거리 잔혹사>, 3.15 부정선거부터 12.12 쿠데타까지 구체적인 역사에 허구적인 디테일을 첨가한 <효자동 이발사>,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알포인트>까지 한국사회, 특히 1970~80년대를 자극하는 영화들은 계속 제작됐고 많은 관심을 받았다.

▲ 영화 '라듸오 데이즈'

'7080'이라는 트렌드가 시들해지는 기미가 보이자, 시대극은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선시대부터 80년 광주까지, 시간과 장르를 넘나드는 수많은 시대극이 양산됐고, 그 중 <왕의 남자> <웰컴 투 동막골> <화려한 휴가> 등은 큰 흥행을 거뒀다. 그리고 지금, 2007년부터 시작된 시대극의 트렌드는 1930~40년대다.

1930~40년대, 그리고 경성은 비단 충무로만의 트렌드는 아니다. 영화는 물론이고 드라마, 연극, 소설까지 문화 전반에 걸쳐 근대 조선의 서울은 소재의 보고라 칭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일본의 강제점령과 독립운동으로 대변되던 이 시대에 주목한 이유는 바로 그 이면에 웅크리고 있던 색다른 이야기 때문이다. 흰 저고리와 검정치마가 연상되는 조선 시대의 막바지에, 대체 우리가 모르던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당시 경성은 모더니티와 신문물의 유입이 절정을 이뤄 거리마다 자유연애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넘쳐났고, 부르주아들은 서구 문물의 혜택을 누리며 향락의 절정에 빠졌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청계천 주변에는 빈민들이 가득했고, 무능한 지식인 룸펜들이 담배와 술로 세월을 보내기도 한, 말 그대로 이질적인 문명들이 상충하며 현대화에 대한 무모한 경외와 혼란스러움이 공존하던 시대였다. 망국의 불안과 이를 망각하려는 쾌락이 내포한 사회적 함의, 모던보이와 모던걸로 대변되는 신물물의 유입이 미친 미학적 함의까지. 무엇을 이야기하든, 우리의 상상 그 이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경성 최고의 서양식 병원 '안생병원'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을 다룬 <기담>은 그 첫 주자였다. 그리고 <원스어폰어타임> <라듸오 데이즈>가 뒤를 이어 관객들을 만났다. 제작된 영화들이 속속 선을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이 세 영화에서 우리가 기대했던 시대의 사회적 함의는 찾아볼 수 없다. 바꿔 말하면, 굳이 그 시대를 택한 이유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이기도 하다. 단지 경성 최고의 서양식 병원, 일본으로부터 강탈당한 후 자취를 감춘 문화재, 조선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차용했을 뿐이다. 장르에 충실한 <기담>을 제외하고, 두 영화는 철저히 트렌드에 편승해 제작된 영화임을 스스로 밝힌 셈이다.

▲ 영화 '원스어폰어타임'

시대를 고증한 세트와 소품이 눈길을 끌지만, 흑백으로 뇌리에 남아있던 당시의 경성에 색을 입히기에도 역부족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던보이는 정장에 중절모, 원형 금테 안경을 쓰고 거리를 활보하며, 모던걸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면 족하다. 전차와 자동차, 인력거와 자전거가 교차하는 경성 거리, 일본군 장교를 비롯한 고위층이 주로 찾는 어두운 바의 내부를 세트로 재현하기에 급급하다. 여전히 등장인물도 전형적이다. 악독한 친일파 말단 순경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우스꽝스러운 독립 운동가는 무모한 행위를 반복하기 일쑤다.

앞서 언급한 세 영화의 만듦새 혹은 목적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함은 아니다. 열을 올려 홍보한 '1930~40년대의 경성'이 우리가 기대했던 것만큼 녹아있지 못함을 언급한 것이다. '7080'이 영화 속에서 좋은 소재로 사용된 이유는 단순한 재미와 감동만도 아니요, 딱딱한 고찰도 아닌 그 중간 지점에서 사람들의 관심과 욕구를 적절히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그 시대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추억과 각성을 나누고, 미래를 꿈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3040'과 '경성'은 '7080'과는 다르다.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그만큼 공유할 것도 없다. 중간 지점이 애매하다. 노골적으로 재미와 감동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딱딱한 고찰로 보일 가능성이 농후하단 말이다. 따라서 시대의 명암을 영화를 통해서나마 관조해 보고픈 욕망은 아직 시기상조인지도 모른다.

▲ 영화 '모던보이'
하지만, '3040' 트렌드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지 오래다. 드라마 '경성스캔들'은 발 빠르게 영화보다 먼저 선을 보였고, 연극 '조선형사 홍윤식'도 무대에 올랐다. 소설 '경성애사' '경성기담-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 '경성 트로이카'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등은 오래 전부터 꾸준히 읽히고 있다. 가장 뒤늦게 선을 보인 영화는 아직까지 시대의 외피만 두른 상태다. 허나 앞선 세 영화가 1930~40년대를, 그리고 경성을 좀 더 가까이 느끼게 만든 것만은 사실이다.

▲ 영화전문포털 '조이씨네' 서정환 편집장
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원작으로 한 <모던보이>는 규모나 캐스팅 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영화다. 사회적, 미학적 함의를 기대할만한 영화의 첫 시작은 아무래도 <모던보이>가 될 것 같다. <화려한 휴가>가 5.18과 광주를 대중 속으로 다가가게 만들었다면, <모던보이>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충무로의 '3040' 열풍의 향방, 이제부터가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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