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부길 목사. 현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 정책기획팀장.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 경선후보의 ‘한반도대운하추진부분부장’은 2007년 8월 12일 <데일리안>을 통해 대중에게, 대중매체를 통해 소개된다. 박정희 대통령도 운하 계획을 수립, 추진한 바 있다는 주장으로 시작했다. 이 후보 경선 승리 후 그는 본격적으로 ‘운하 전도사’로 나선다. “인터넷 매체 등에 운하 찬성론을 기고하는 등 논쟁을 공세적으로 주도”하는 적극적 홍보전의 핵심이 된다. 그렇다. 추부길 목사는 운하 전문가가 아닌, 운하 전도사다. 숭고한 말씀, 거룩한 바이블의 설파, 전파, 홍보, 선전을 맡은 사람이다. ‘여론’을 만들고, ‘언론’을 조정하며, 홍보를 실행하고 선전을 독려하는 책임자라고 할 수 있겠다.

안양대 신학대학원 겸임교수인 추씨가 얼마나 오랫동안 운하에 대해 따로 공부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운하야 놀자>, <왜 한반도 대운하인가>와 같은 홍보성 책자를 낸 것은 각각 작년 12월, 10월이었다. 그 전에는 <선거 마케팅>, <한국의 정치광고>, <국회의원 선거백서>, <국회의원 매뉴얼>과 같은 것들을 냈다고 한다. 모닝365가 제공하는 이력을 봐도, 오리콤, 동방기획을 거쳐 한길마케팅서비스를 창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스트커뮤니케이션 대표이사를 지내면서 정치 마케팅 전문가로 입지를 굳혔다고 한다. 90년대 초부터 정치 마케팅을 해왔고, 1992에는 김대중 민주당 후보의 홍보팀장을 지내기도 했단다. 정치 캠페인ㆍ홍보 전문가임에 틀림없다.

▲ 한나라당 입구에 붙어있는 한반도대운하 포스터ⓒ민중의소리

그래서 이런 의문이 생긴다. 왜 캠페인ㆍ홍보 전문가가 이 나라 미래를 좌우할 프로젝트의 핵심에 있는가? <주간동아>가 이에 관해 답을 제공하고 있다. 1월 23자 <주간동아>는 추 팀장을 인터뷰하면서, 그를 ‘대운하 홍보’를 도맡은 인물로 정확하게 정리한다. 그러면서 잡지는 “요컨대 이 당선자를 필두로 한 차기 정부 측은 여론 추이와 무관하게 대운하를 밀어 붙일 태세다. ‘운하를 하느냐 마느냐’는 결정됐고, 보완점과 관련해서만 여론을 수렴하겠다는 것이다”라고 결론 맺는다. 운하 설계도면은 이미 지난해 12월에 완성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까지 알려준다. 이제 모든 게 명쾌하게 해명된다. ‘여론’의 의미, ‘홍보’의 개념, 전도사의 역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나라의 운명까지도.

<주간동아>가 심각한 오보를 하지 않았다면, 대운하와 관한 한 모든 것은 사실상 끝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반대 의사는 더 이상 여론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오직 운하를 어떻게 만들지, 그 ‘보완점’과 관련된 의사만 ‘여론’으로 취급될 것이라는 뜻이다. 1월 25일 부산에서 열린 ‘한반도 대운하와 물류’ 토론회에서 인수위 한반도 대운하 TF팀 공동위원장 한나라당 박승환 의원이 한 축사가 이를 정확하게 압축하고 있다. “그 동안 운하에 대한 많은 토론이 있었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 정치적 반대에 그친 소비적 행사였다.” “이제는 소비적 논쟁을 넘어 부족한 점이 있다면 보완하고, 잘된 점은 더욱 독려하면서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뤄 나가야 한다.” 합의란 결국 찬성하는 자들끼리의 동의를 뜻한다.

지극히 단순하고 섬뜩한 논리다. 1) 반대 의견은 ‘반대를 위한 반대’에 불과하다. 2) ‘소비적’이고 ‘정치적’인 논쟁을 넘어서야 한다. 3) 보완과 독려의 생산적 논의가 필요하다. 4) 그렇게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사회, 환경단체, 종교계의 주장은 ‘반대를 위한 반대’에 다름 아니다. 대운하에 대해 분명한 반대 의사를 표시한 신당 대표도 소모적 정략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에서 마찬가지다. ‘한반도 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서울대 교수 모임’ 참가 학자들은 또 어떠한가? “감정적이고, 운하에 대해서는 정확한 지식이 없이 반대하는 분들”일뿐이다. 우리의 추 팀장께서 보시기에, “심지어 교수라는 분들이” 논리적이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

‘여론’과 ‘합의‘가 이렇게 다수의 반대를 배제ㆍ생략ㆍ폄하한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바로 그 여론 제조ㆍ공작에 팀장, 위원장들이 몰두해 있다. 오해하지 말자. 신자유주의 자본국가의 ‘여론’수렴은 명백한 한도 내에서는 ‘민주적’이다. ‘토론의 과정’을 거친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한다. 단, 전제조건이 있다. 이미 결정된 내용과 일정을 촉진시키는 한도 내에서다. 1월 30일 개최된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 공청회가 정확하게 입증시켜 주었다. ‘공청회’에 대한 우리 ‘초딩’, ‘중딩’, ‘고딩’들의 상식까지도 뒤엎어버린 이 잘난 어른들끼리의 거짓 공청회는 언론자유에 관한 차기 정권의 수사가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반증한다. 절망적 비극의 바닥, 허무한 웃음의 벽을 친다.

초라하게 낙향할 노 정권이 한미FTA 개시 하루 전 소위 ‘공청회’를 연 것과 똑같다. 노골적이고 뻔뻔하다. ‘국민여론’을 대놓고 능멸한다. 2008년 이 땅에서 ‘여론’과 ‘합의’, ‘토론’은 선전과 조작, 지시의 레토릭, 아니 정확히 발음 해 뤠토뤽에 다름 아니다. 밀실을 가리는 야한 간판에 불과하다. ‘여론’을 청취했고, ‘전문가 의견’도 들어봤으니, ‘국민적 합의’에 따라 나아가는 일만 남았다. 그게 권력의 의지다. 대운하 공청회의 전도도 뻔하다. 애당초 인수위는 2월 초에 개최하겠다고 했는데, 이제 추 팀장은 “어차피 새 정부가 출범한 후에 가능하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대운하 건설을 추진 할지, 말지를 논의하기 보다는 어떻게 해야 잘 추진할 수 있을지를 토론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 한겨레 2007년 9월 12일자 6면

‘합의’는 아래로부터, ‘지역’과 ‘국민들’로부터 ‘자발적’으로 나오기도 한다. 지역 대학교수들과 환경단체의 비판적 목소리를 청취한 충북개발연구원에 대해, 이른바 ‘충주사회단체연합회’가 기자회견을 갖고 “21세기 희망 프로젝트임이 분명한데도 워크숍을 통해 반대를 위한 반대론자들을 위한 멍석을 깔아준 연구원은 공식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그 일례다. 그렇지만 이성적 비판, 합리적 반대의 판단을 맹목적인 ‘반대를 위한 반대’로 폄훼하는 위원장, 반대의사를 ‘역주행’의 질서 파괴적 행위로 몰아가는 대통령 당선자,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의 대변자 역할을 자임하는 ‘영혼 없는 전문가’들에게 훨씬 큰 책임이 있다. 대운하 문제를 ‘여론 전문가’를 통해 해소코자 하는 정치공학적, 비민주적, 반사회적 발상이 문제다.

운하에 관한 경제, 사회, 문화, 생태적 차원의 본격적 토론을 차단하는 여론정지, 즉 홍보ㆍ캠페인의 불량작업은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해 단호히 고발되어야 한다. <CBS>의 최근 여론조사는 응답자의 43%가 대운하 반대의 의사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찬성 41%보다 높다. 그런 ‘국민여론’이 왜 묵살되어야 하는가? ‘국민’ 운운하는 자들은 어디 갔는가? 신문, 방송은 또 누구의 눈치를 보고 침묵하는가? 뻔질나게 해대던 여론조사를 왜 하지 않는가? 여론을 따르지 않은 채 일방 선전에 몰두한 세력과 이에 공모한 집단은 모두 ‘열린사회의 적’이다. 민주주의가 이렇게 근본에서부터 허물어지는 데도 침묵하는 교수, 정치권을 기웃거리기에 바쁜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아, 정말 끝이 안 보인다. 환멸 그 자체다.

지금처럼 ‘비평의 무기’를 예리하게 연마하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할 때가 있을까? 벼락같은 이성의 도끼질, 결을 거스른 감수성의 대패질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래디컬’한 저널리스트로의 변신. 자본권력과 국가권력, 매체권력, 지식권력이 나의 상대다. 가끔 참패당하고 때로는 붙잡고 버티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왼손펀치 한방을 가진 선수로 남고 싶다. 인민은 착하고 또 무섭다. 이들과 함께하는 비평 말고 그 어떤 것이 후기근대, 후기자본의 불모지대를 넘어갈 수 있겠나? 목청 낮춘 채 예의주시하는 보통사람들의 삶, 이들의 언어에 스며들어 비평의 유격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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