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장영] 월요일 방송되던 <MBC 스페셜>이 목요일로 시간대를 옮겼다. 그리고 첫 방송을 '부마민주항쟁'을 2부작으로 준비했다. 드라마와 다큐를 적절하게 배합한 방식도 색다르지는 않지만 잘 적용되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기폭제였던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었다.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항쟁은 그렇게 박정희 유신체제 붕괴로 이어졌다. 억눌렸던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며 박정희 정권의 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대통령 저격으로 '유신체제'는 완벽하게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전두환이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며 독재는 지속되었다.

드라마 방식을 도입한 다큐는 실존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아이들이 '유신찬가'를 부르던 시절, 오직 박정희를 신격화하고 찬양해야만 했던 그 시절의 통제는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었다.

MBC 스페셜 ‘부마항쟁 40주년 특집 1979 1부 - 나는 저항한다’ 편

대통령에 대한 발언만 해도 잡혀가던 시절이 바로 70년대다. 장발도 안 되고 짧은 치마를 입어서도 안 된다. 불온서적과 음악은 통제되었다. 그 기준은 오직 박정희를 찬양하느냐 아니냐다. 절대적인 존재인 박정희를 찬양하지 않는 모든 이들은 간첩일 뿐이었다. 신기하게도 이런 논리는 현재에도 존재한다. 지난 촛불 정국을 지나며 빨갱이 몰이가 급격하게 맥을 못 추는 상황이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북풍을 노리는 자들이 넘쳐난다.

박정희 최측근인 박종규가 지배하던 경남대. 그곳에서 유신체제에 반대하던 학생들의 이야기는 처참했다. 더는 참지 못하고 들고일어났던 학생들은 잔인하게 억압당했다. 여학생들은 치마를 뒤집어 얼굴을 가린 채 끌려가 다리가 피투성이가 될 정도였다.

고문을 자행하는 경찰들에게는 어린아이도 의미가 없었다. 그저 데모를 했을 것이라는 이유로 고교생들까지 잡아가 무자비한 폭행을 하는 당시 경찰은 일본 순사 그 자체였다. 억압만이 유일한 통제수단이었던 박정희 정권. 잘못된 정책으로 경제가 무너지고, 직격탄을 맞은 부산지역은 불만이 폭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4.19 이후 가장 많은, 3천 명이 넘는 이들이 거리로 나섰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 시위를 시작으로 부마민주항쟁은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17일 청와대에서는 박정희와 정치인들은 유신 선포 기념식을 즐기고 있었다. 전날 학생들이 거리에 나서고, 그런 학생들을 억압하는 상황에서 청와대는 웃고 있었다.

MBC 스페셜 ‘부마항쟁 40주년 특집 1979 1부 - 나는 저항한다’ 편

박정희의 최측근 차지철은 2백~3백만 정도를 죽여도 상관없다며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특전사 공수여단이 18일 부산으로 급파되었다. 김재규와 전두환이 현장으로 향했다. 중정 김재규는 현장을 보고 박정희의 유신 체제는 끝났다고 확신했다. 전두환은 그와 반대였지만 말이다.

유치준 사망 은폐와 故김주열 열사 사건 등 정권은 그렇게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기에만 급급했다. 부산대 시위 10일 후인 10월 26일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무너졌다. 그렇게 유신체제는 종말을 기했다. 김재규의 이 선택은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바꿨다.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으로 인해 늦춰지기는 했지만, 그렇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국민들에게 각인되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87년 6월 항쟁, 그리고 촛불 혁명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쟁취 역사는 계속 이어졌다.

<MBC 스페셜>은 색다른 접근법으로 중요한 역사의 순간을 담았다. 처음으로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부마민주항쟁'을 위한 특집이라는 점에서도 특별하게 다가왔다. 가장 늦게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부마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다. 그런 점에서 <MBC 스페셜>의 선택은 반갑다.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절실함으로 다가오니 말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