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이동진 평론가의 해석의 따르면 <조커>의 배경은 1981년 10월 15일이다. 근거는 오프닝씬의 뉴스와 빌보드차트다. 오프닝에서 뉴스앵커는 오늘이 10월 15일 목요일인데 환경미화원들의 파업 때문에 고담시에 쥐떼가 들끓고 있다고 말한다.

1980년을 전후해서 10월 15일이 목요일인 해는 1981년뿐이다. 그리고 10월 15일 빌보드 싱글차트 1위곡은 크리스토퍼 크로스의 Arthur's theme다. 우리에겐 The best that you can do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팝발라드다. 가사를 살펴보면 이동진 평론가의 해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Arthur he does what he pleases
All of his life his master's toys
And deep in his heart
He's just he's just a boy
Livin' his life one day at a time
He's showing himself a really good time
He's laughin' about the way
They want him to be
아서 그는 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
그의 삶은 온통 주인의 장난감 같은 것이었지만
마음 저 깊은 데서
그는 아직 어린 소년일 뿐
그는 그날 하루 하루만 생각해
늘 정말 멋진 시간을 보내지
그저 웃어 넘겨
사람들이 자신한테 바라는 것에 대해선

Christopher Cross - Arthur theme(The best that you can do) 중에서

영화 <조커> 오프닝씬 중에서

조커는 왜 White room을 들었을까

모든 게 우연의 일치일 확률은 낮아 보인다. 감독 토드 필립스는 아서가 담배 피우는 이유 하나, 아니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유까지 호아킨 피닉스와 논의했다고 한다. 작곡가인 힐더 구드나도티르(Hildur Guonadottir)에게 미리 시나리오를 주고 매일 연락을 주고받으며 수록곡을 받아 현장에서 재생하며 녹화했다고 한다. 사소한 연출 하나에도 공을 들인 거다.

이 부분에서 물음표가 하나 생긴다. 왜 조커가 머레이를 죽인 후 경찰에 연행되는 클라이막스에서 크림(The cream)의 White room이 흘러나왔을까. 감독의 설정에 따르면 아서는 머릿속에서 혼자 재생되는 음악이 있는 캐릭터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춤을 추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집에서도 흑백시절의 고전영화를 즐겨보던 아서가 60~70년대 록음악을 좋아했다는 증거는 영화 내에서 찾을 수 없다.

White room의 사전적 의미인 ‘무균실’을 통해 조커가 아캄정신병원의 하얀 방으로 송치될 거란 의미를 전달하고 싶어서였을까. 일단 가사는 조커가 앞으로 맞이할 상황과 비슷하다.

In the white room with black curtains near the station
Black-roof country, no gold pavements, tired starlings
Silver horses run down moonbeams in your dark eyes
Dawn-light smiles on you leaving, my contentment
I'll wait in this place where the sun never shines
Wait in this place where the shadows run from themselves
기차역 가까운곳에 까만 커튼이 쳐진 하얀 방에서
검은 지붕 시골, 금으로 포장된 도로는 없어, 지치게 하는 통로 말뚝들
은빛 말은 그대의 어두운 눈으로 달빛 되어 달려간다
새벽 여명은 그대가 떠남에 미소 짓고, 나의 만족
나는 태양이 결코 비치지 않는 이곳에서 기다릴 거야
그림자가 그들로부터 드리워진 이곳에서 기다릴 거야

Cream – White room 중에서

하지만 피상적인 가사해석을 벗어나 White room이 수록된 앨범의 제목 [Wheels of fire]와 앨범이 발표된 연도 '1968년'에 주목하면 <조커>의 주제의식에 조금 더 깊숙하게 접근할 수 있다.

크림(Cream)의 3집 앨범 [Wheels of fire]

불타는 수레바퀴에 묶인 조커

'Wheel of fire'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켄타우로스의 조상 익시온이 묶인 형틀 '불타는 수레바퀴'를 말한다. 익시온은 그리스로마신화 최초의 친족살해범이다. 지독한 구두쇠인 그는 결혼지참금을 주기 싫다는 이유로 장인을 불구덩이에 집어던진다.

극형에 처할 일이지만 제우스는 아량을 베풀어 신들의 연회에 초대한다. 그러나 오만하게도 헤라에게 흑심을 품는다. 괘씸한 헤라는 구름으로 본인의 형상을 만들어 익시온에게 보낸다. 구름과의 관계에서 켄타우로스가 탄생한다. 두 가지 죄로 수레바퀴에 묶여 영원히 불에 타는 형벌을 받는다.

그림 알렉상드르 드니 아벨 드 푸졸 - 타르타로스에 결박되는 익시온 (c)The Louvre Museum

문학적으로 '불타는 수레바퀴'는 캐릭터의 '결정적인 결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고귀한 인물이 타락하는 비극에서 청중의 동정을 구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에서 리어왕의 비극을 묘사할 때(But I am bound upon a wheel of fire. That mine own tears do scald like molten lead), 톨킨은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가 절대반지를 낀 심정을 묘사할 때(I begin to see it in my mind all the time, like a great wheel of fire) 불타는 수레바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조커>를 보자.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발작적인 웃음은 광대라는 생계수단을 빼앗고 지하철에서 우발적 살인으로 연결된다. 따뜻한 웃음을 보여준 유일한 여성인 소피와의 사랑은 혼자만의 망상에 불과했으며, 어머니가 말해준 과거들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난다. 결국 아서는 친족살해라는 비극을 향해 달려가고 불타는 수레바퀴에 영원히 결박당한다.

영화 <조커> 중에서

조커가 TV에 두 번 등장하는 까닭

‘1968년‘이란 키워드 해석을 위해서는 미국의 정치사회적 정보를 곁들여야 한다. 미국에서 1968년 가장 극적인 사건은 닉슨의 대통령 당선이다. 중요한 건 닉슨이 대통령 재수생이었다는 점이다. 1960년 대선에 출마한 닉슨은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TV토론에서 케네디에게 박살이 난다.

라디오를 통해 토론을 들은 사람들은 팽팽한 접전으로 평가했지만 브라운관을 통해 보이는 '이미지'가 문제였다. 닉슨은 포도상구균 감염과 무릎 수술로 체중이 9kg이나 빠진 상태였고 분장과 조명도 거부한다. <분노의 포도>를 쓴 작가 존 스타인벡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수사학적인 토론 솜씨는 무승부였지만, 화면에 비친 두 사람의 인상에서는 서부극의 전형적인 장면이 떠올랐다. 즉 검은 머리카락에 상을 찌푸리고 있는 닉슨은 전형적인 악당이었고, 짙은 금발에 귀족적이고 표정이 없는 케네디는 악당과 마주선 주인공이었다.“

1960년 닉슨과 케네디의 TV토론

고배를 마신 닉슨은 1968년 다시 한번 대권에 도전한다. 절치부심한 끝에 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시대도 닉슨을 원했다. 전임 대통령인 린든 B. 존슨의 불출마 선언, 유력한 후보자였던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민주당의 분열이라는 호재도 있었지만 가장 큰 조력자는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의 등장이었다.

알다시피 아서는 머레이쇼에 두 번 등장한다. 한번은 민낯으로 조롱 받으며, 또 한 번은 화려한 분장과 함께 환호 받으며. 처음에는 미디어가 조커를 이용했지만, 두 번째는 조커가 미디어를 이용한다. 불타는 고담을 배경으로 White room이 흘러나오고 침묵하는 다수의 열광을 받으며, 아서는 피로 물든 미소와 함께 조커로의 변신을 마무리한다.

영화 <조커> 중에서

'조커' 후속편이 나오는 세계는 불행하다

이제 'The wheel of fire'와 '1968년'에서 추출한 두 가지 키워드를 합쳐보자. 결정적인 결함을 지녀 몰락하는 듯 보였으나 침묵하는 다수의 지지를 얻어 슈퍼스타가 된 빌런. 다소 동떨어진듯 보인 White room은 조커의 캐릭터를 구성하는 두 가지 특징을 절묘하게 충족시키는 선곡이었다.

그리고 White room은 2019년에도 유효하다. 물론 "좋은 이야기는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토드 필립스가 조커의 등장을 바라며 영화를 만든 건 아닐 것이다. 사실은 그럴 필요도 없다. 결정적인 다수의 결함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는 다수의 지지를 얻어 세계를 혼란으로 몰고 가는 영화보다 영화 같은 캐릭터를 우리는 매일 저녁 국제뉴스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76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토드 필립스 감독(左)과 호아킨 피닉스(右) 연합뉴스TV TV 화면 캡처

토드 필립스가 《토털 필름》과의 인터뷰에서 ’<조커>의 후속편을 생각해보지 않았다(But the movie's not set up to have a sequel. We always pitched it as one movie, and that's it)‘고 말한 이유도 마땅하다. <조커>의 목적은 불타는 수레바퀴로 영겁의 고통을 받아야 조커가 왜 고담의 슈퍼스타가 됐는지 이해하는 것이지, 박쥐가면을 쓰고 날뛰는 자경단을 소환하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You complete me. 또 다른 세계에서 날뛰는 조커는 본인을 완벽하게 만드는 건 배트맨이라고 고백했다. 극장을 나온 우리에게는 선택이 필요하다. 고담에 주민세를 내고 싶지 않다면 박쥐가면을 쓴 세계 최고의 갑부의 선의를 바라지 말고, 침묵하는 다수의 환심을 살 범죄자의 악행을 미리 차단하자. 브레히트의 말은 언제나 옳다. 영웅이 필요한 세계는 불행하다. 악당을 바라는 세계는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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