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승리했다니 믿을 수 없군요. 평화와 번영, 그 상징인 고어에 반대해서 싸웠거든요."
- 조지 부시, 2001년 6월 14일. 생방송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스웨덴의 페르손 총리에게 한 얘기.

▲ '멍청한 백인들' 책 표지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글귀다. 책장을 넘겨 ‘들어가는 말’로 접어들자, 눈에 띄는 대목이 나타난다. “우리가 선출하지도 않은 인물이 지금 백악관에 딱 버티고 앉아 있다. 캘리포니아주는 사형을 집행할 전기의자는 고사하고 주스기계를 작동시킬 전기조차 없다.” 전자는 2000년 미국 대선 당시 플로리다주에서 일어난 부정선거를, 후자는 200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일어난 전력 대란을 가리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앞의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민주주의>를, 뒤의 것은 <민주주의와 규제>를 딱 한 문장씩으로 핵심만 간단히 정리해놓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 책읽기’라는 제목으로 앞에 쓴 글 두 편의 진실을 거듭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지난 2000년 미국 대선과 당시 플로리다 선거 부정의 실체가 ‘문제의 삭제 리스트’라는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민주주의>에서 배울 수 있었다면, 이 책은 같은 결과를 초래한 다른 증거를 보여준다. 부정선거 시비가 일어 재검표가 시작되자 판정이 번복될까봐 불안해진 부시는 묘안을 찾아냈다. 해외에 파병된 미군들의 표, 즉 부재자 투표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부시 진영은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하는 파병 미군들의 표를 하나라도 더 끌어 모으기 위해 세계 각지에 떠 있는 미 해군 함정에 빠진 표가 있으면 모두 걷어서 보내라는 긴급 이메일을 보냈다. 다행히 수천 표가 도착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수천 표로는 도무지 승리를 안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부시는 또 한 번 ‘도둑질’을 감행했다. 부재자 표 가운데 선거일 뒤에 서명한 표까지 모두 유효표로 만들기 위해 부시 진영 선거관리위원장이었던 캐서린 해리스는 선관위 담당자들에게 “꼭 선거일 이전이 아니라도 괜찮다.”는 메모를 보냈다. 때문에 유효표와 무효표를 가르는 기준이 제 멋대로 돼버렸다. 다음은 <뉴욕 타임스>에도 보도됐다는 유효표 조작의 몇 가지 사례들이다.

* 183표는 미국 내 우체국 도장이 찍혀 있다. (부재자 투표인데도!)
* 169표는 투표한 자가 미등록자이거나, 봉투에 제대로 서명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남의 투표 용지에 찍어 낸 것이었다.
* 5표는 11월 17일 마감일이 지난 후에 배달되었다.
* 투표 용지 두 장을 낸 투표자도 19명이나 됐는데, 두 장 다 유효표로 인정되었다. (이럴 수가!)

저자는 그래도 의심을 걷어내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친절하게도 “부정할 수 없는 문서상의 증거는 아직도 탈라하시(플로리다주 청사가 있는 도시)에 곱게 보관돼 있다.”고까지 일러준다. (고어가 선거에서 이기고도 대통령이 되지 못한 건 재검표를 막은 연방대법원 판사 다섯 명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도 저자는 잊지 않는다.)

▲ 마이클 무어

플로리다 선거 부정은 저자가 갈파했듯 미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하나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저자는 부시가 당선된 이후 철저하게 미국 대기업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구성된 부시 행정부의 각료들(“유엔군이 체포하기 쉽도록” 저자가 ‘반란군 주요 인물’이라는 부제가 붙은 1장에 상세한 명단과 약력을 정리해 놓았다.)과 그 정권 아래서 전에 없이 배부르게 떼돈을 벌어들인 백만장자들 때문에 미국에 전염성 강한 ‘또라이 백인 바이러스’가 판을 치기 시작했다며 거침없는 비난을 쏟아낸다. “그들은 탐욕이라는 말을 ‘성공’으로 바꿔서 사용했다. 자기 배만 불리려고 꾸역꾸역 처먹는 식충 행위에 대해 아무도 나쁘다거나 보기 흉하다고 생각지 않는 풍조가 돼 버렸다. (중략) 언제부터 이 악(惡)의 문화가 대중에게 뿌리를 내려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 전환점이 된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명확하다. “왜 이렇게 되었나?”라며 스스로 질문을 던진 뒤 이렇게 대답한다. “바로 세 단어 - 멍청한 백인놈들(Stupid White Men) 때문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신랄한 비판과 문제의식은 백인을 중심으로 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조준하고 있다. 저자는 노예제도에서 시작된 뿌리 깊은 흑백 인종차별과 빈익빈 부익부로 인한 사회 양극화, 문맹을 양산하는 잘못된 공교육 제도와 환경 파괴적 정책, 남녀 차별과 행형제도 등 자본주의의 그늘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모순에 이르기까지 미국 사회 구석구석에 감춰진 치부를 낱낱이 까발린다. 미국이 훌륭한 인권국가이며 민주주의 국가라고 배운 -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는 - 사람들에겐 믿기 어려운 얘기일 수도 있겠다. 예컨대, 유엔 아동권리헌장에 서명하지 않은 국가는 소말리아와 미국 밖에 없다. 왜? 이 헌장에 있는 18살 이하 아동을 죽일 수 없다는 조항이 미국 형법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인권을 밥 먹듯 유린하는 중국조차도 18살 미만은 안 죽인다. 그러니 “이 위대한 나라에서 우리는 범죄와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자들과 전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는 사이에 돈을 절약하기 위해 인권은 간과하기에 이르렀다.”며 분노와 한탄을 내뱉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자유라는 탈을 쓴 ‘방종’은 이렇게 돈 없고 힘없는 이들의 피를 빨아 배를 불린다.

▲ 부시 미 대통령 현상 포스터
무엇보다 저자 마이클 무어의 정신세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와 ‘배부른 자를 위한 기도’가 주는 페이소스는 가히 이 책의 백미(白眉)라 할 만하다. 여기저기 표현은 거침없지만, 문제의식은 분명하고 진지하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서 파생되어 오늘까지 전해 내려오는 문제점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을 느끼기 전에는 우리 국가의 영혼에 남은 오점을 한 점이라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두려움과 맞서자고, 우리의 진짜 주인은 우리라고, 그러니 힘을 발휘하자고, 우리에겐 지금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한 달음에 읽히는 이 흥미진진한 책은 마지막까지도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책의 말미에 덧붙어 있는 ‘미디어 서평’ 가운데 <조선일보>에 어느 교수가 쓴 서평의 한 대목이다. “자신들의 행태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까발리고 권력 엘리트를 희화화하는 것 역시 미국 문화의 일상임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자신들의 치부를 발가벗긴 양심선언의 충격이 다른 사회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맞는 말씀이기는 한데, 여기서는 꽤나 불필요해 보인다. 이런 유의 평가절하는 그것이 실린 신문의 평소 태도나 논조를 생각하면 결코 곧이곧대로 들리지는 않는다. 진실이 가진 속성은 꼭 누군가는 그것을 몹시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쉬의 저서 <밀라이 학살과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 준비 중이고, 현재 KBS 사회팀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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