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브레이브 - 코엔 형제가 빚은 서부극 동화 ★★★★☆

<더 브레이브>는 1968년에 출간된 동명의 원작 소설이 있고, 이 소설을 먼저 영화화한 작품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동명'이란 한글제목인 '더 브레이브'가 아니라 원제인 'True Grit'을 지칭합니다) 영화의 경우에는 그 유명한 웨스턴 무비의 아이콘인 존 웨인이 주연했었죠. 코엔 형제의 <더 브레이브>는 리메이크가 아니라 맷 리브스의 <렛 미 인>처럼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했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전 둘 다 보질 못한 관계로 <더 브레이브> 자체만 논하겠습니다.

일단 한번 웃고 시작할까요? 미국 박스 오피스를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더 브레이브>는 코엔 형제의 작품 중에서 가장 흥행에 성공한 작품입니다. 현재 미국에서만 1억 6천만 불이 넘는 수입을 올렸는데, 이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보다 두 배 이상 많은 금액입니다. 뿐만 아니라 역대 서부극 중에서는 <늑대와 춤을>에 이은 2위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흥행성적만 봐도 짐작이 가겠지만 이 영화, 정말 재미있습니다. 작품 내적으로도 재미있고 외적으로도 재미있습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코엔 형제는 이제 자신들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일정 수준 이상으로 만들 수 있을 듯한 기세입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더 브레이브>는 코엔 형제다우면서도 코엔 형제답지 않은 작품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장르의 틀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던 코엔 형제의 면모는 거의 엿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비교적 충실한 편입니다. 예를 들어 <더 브레이브>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필요한 원천에는 복수가 있습니다. 등장인물로는 무법자와 카우보이가 있으며 보안관도 있습니다. 물론 그들 사이에서는 몇 번의 총질도 일어납니다. 결말도 예정된 수순을 밟으면서 끝납니다. 서부극을 많이 봤다고 할 순 없지만 이 정도면 꽤 전형적인 구성이겠죠?

반면에 코엔 형제에 걸맞은 변주도 있습니다. 상당부분 원작의 영향일 것도 같은데, <더 브레이브>는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흥미롭습니다. 주인공이자 극중 화자에 해당하는 '매티'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14살의 소녀는 나이와 귀여운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당돌하고 강인합니다. 관에 누운 아버지의 시신을 보고 눈물을 흘리긴커녕 장례비용이 왜 이리 비싸냐며 따질 정도죠. 심지어 갈 곳이 없다며 시체들 틈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거래했던 자를 찾아가서는 거의 강탈하다시피해서 돈을 마련합니다. 한 마디로 어지간한 어른은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는 소녀에요.

불타는 복수심은 또 어떻고요. 매티는 아버지를 죽인 '톰 채니'를 잡고자 유능한 보안관을 물색합니다. 이에 몇 사람을 추천받지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은 소녀는, 주저하지 않고 흉폭하기로 악명이 자자한 '루스터 카그번'을 택합니다. 이상의 설정은 <더 브레이브>를 이끌고 가는 데 아주 유용하고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초반부터 매티라는 캐릭터를 확고하게 잡으면서 '14살 소녀의 복수극'이라는 이야기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한다는 면에서 말입니다. 한편으론 불리한 상황에만 몰리면 무턱대고 변호사를 찾는 모습에서 역시 애는 애라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매티를 도와 톰 채니를 뒤쫓는 카그번도 꽤 특이한 캐릭터입니다. 표면적으로 <더 브레이브>를 독특한 영화가 되게끔 하고 있는 것도 바로 카그번일 것입니다. 그는 일련의 정통 서부극에 등장하는 영웅주의식 캐릭터와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용맹하지만 주정뱅이에다 돈을 밝히는지라 정의감으로 가득하고 터프한 보안관과는 거리가 있죠. 이른바 수정주의 서부극의 끝자락에 있다는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윌리엄 머니'가 오버랩되지만, 카그번이 보다 우스꽝스럽고 풍자의 도구에 가까운 듯 보입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복합적인 캐릭터라 그를 눈여겨보면 극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상대적으로 주요 캐릭터 중에서 비중이 가장 적은 '라 뷔프'도 간과할 순 없습니다. 텍사스 레인저인 그는 톰 채니에게 걸린 현상금을 노리고 매티, 카그번과 동행합니다만, 사실 라 뷔프는 그 자체로 극에서 존립하진 못하는 캐릭터에 가깝습니다. 대신에 그가 카그번과 티격태격하면서 보여주는 불협화음은 <더 브레이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카그번과 라 뷔프의 앙상블(?)은 역시 이 영화를 정통 서부극에서 한발짝 물러나게 합니다. 쉽게 말해서 둘의 다툼은 마초 근성으로 똘똘 뭉친 한심한 자들의 자존심 싸움이에요. 그것도 14살짜리 소녀를 앞에 두고서 말입니다.

코엔 형제는 이 두 캐릭터, 정확히 둘의 조화를 다루는 데 있어 설렁설렁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능수능란합니다. 그래서 <더 브레이브>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판결하는 데 어려움이 따릅니다. 어떻게 보면 정통 서부극의 거짓된 영웅주의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수정주의인 것 같은데, 또 어떻게 보면 영웅주의로 점철되진 않되 영웅의 일화를 다루는 것도 같거든요. 이 때문에 저는 <더 브레이브>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돌려서 보기로 했습니다.

<더 브레이브>는 코엔 형제가 빚은 일종의 서부극 동화입니다. 오프닝을 보면 그런 분위기가 적지 않게 느껴집니다. 이 영화는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매티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즉 지난날의 이야기를 추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티는 "어린 소녀가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고자 방황하던 날이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카메라는 불이 켜진 집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죠.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화면에는 눈이 내리고 있으며 음악은 잔잔하기까지 합니다. 점점 더 다가간 카메라에는 쓰러진 남자가 보이고, 그렇게 매티의 내레이션은 아버지가 죽게 된 과정을 설명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중년이 된 매티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담으며 내레이션이 흐르고, 오프닝과 동일하게 눈이 휘날리고 있습니다. 음악은 조금 서글프고 애처롭지만 나름 이야기의 매듭과 잘 어울리는 곡입니다. 아무튼 두 장면 모두 짠하고 애잔한 감상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 번의 사투가 벌어진 후에 일어나는 일 또한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 결말에 도달하면 약간의 허무주의를 동반한 짙은 향수를 자극하기도 합니다. "그땐 그랬지"라는 듯이 과거를 추억하는 영화는 카그번과 라 뷔프로 대변되는 카우보이를 추도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더 브레이브>는 코엔 형제 특유의 엽기발랄하고 재기 넘치는 영화는 결코 아닙니다. 최근작인 <번 애프터 리딩>처럼 작정하고 망가지는 영화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처럼 서슬 퍼런 살기와 호흡곤란을 일으킬 정도의 중압감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앞선 <파고, 위대한 레보스키> 등을 들먹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참 재미있습니다. 특히 장례식을 치른 지 꽤 된 것 같은 서부극을 이만큼 훌륭하게 되살렸다는 것은 아카데미가 분명 반길 만한 일입니다. 또한 이미 결과가 나왔듯이 부담감이 없다는 면에서 일반관객들도 환영할 만합니다.

덧1)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남우주연상 후보는 정말 쟁쟁하네요. 수상자로는 콜린 퍼스가 확정적인 상황입니다만 <더 브레이브>의 제프 브리지스도 훌륭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크레이즈 하트>보다 이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밖에도 제가 직접 본 제임스 프랑코와 제시 아이젠버그도 수상자로 손색이 없습니다.

덧2) 만약 아카데미 시상식에 아역배우상이 있다면, 단연 이 영화에서 매티를 연기한 헤일리 스테인필드의 몫이 될 겁니다. 현재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라있는데 수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만약 수상하면 최연소 수상자가 되려나요?

덧3) 비중은 적지만 라 뷔프를 연기한 맷 데이먼과 톰 채니를 연기한 조쉬 브롤린의 찌질함(?)도 제법 인상적입니다.

덧4) 아카데미 위원회가 <더 브레이브>를 10개 부문의 후보로 올린 건 서부극에 대한 향수의 영향도 있었을 것 같네요.

덧5) 코엔 형제는 지금쯤 의기양양하겠습니다. 다음에는 SF에도 한번 눈독들여 보면 어떨까요?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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