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광장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뜨겁던 촛불의 열기로 타오르던 광장이 불과 몇 년 만에 서로 다른 목소리로 나뉜다. 입장의 차이라고 한다. 진보와 보수의 문제라고도 한다. 혹은 시대적 과제와 집권층의 부도덕 문제라고도 한다. 그리고 세대의 갈등이라고도 한다. 모두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도무지 틀리지 않은 주장들이 서로 '합의'에 이를 길은 요원해 보인다.

이렇게 갈라진 세상에 1000회를 맞이한 EBS <다큐프라임>은 무려 6부작의 대장정을 통해 '진정성'을 이야기한다. 누가 더 진정성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진정성의 시대’가 변한 게 아니냐고.

정의의 시대, 1980년대

EBS 다큐프라임 6부작 <진정성 시대>

6부 <진정성이란 무엇인가>는 이제는 대통령상까지 받은 소목장이 된, 586세대 양석주씨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석주 씨. 1980년 휴교령이 떨어지자 6.25를 겪은 아버지는 아들을 산속 텐트로 보내고 한 발도 나오지 못하게 했다. 휴교령이 풀리고 돌아간 학교, 하지만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을 기다리며 그의 마음속 죄책감은 커졌다. 그리고 그 마음은 1983년 대학에 입학한 그를 자연스레 시위로 이끌었다.

그렇게 586세대가 자신을 내던졌던 1980년으로부터 물꼬를 튼다. '학우여'의 '학'자만 외쳐도 교내 곳곳에 포진되어 있던 사복 경찰이 와서 잡아가던 시대. 그래서 학생들은 자신을 도서관 난간에 매달았다. 그 난간에서 황정하 열사가 세상을 떠났다. '산자여 따르라'며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자신이 몸에 불을 붙였고 이한열, 박종철 등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 그런 동료 학생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박혜정 열사는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가 없어 부끄럽게 죽을 것'이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80년대를 살았던 학생들은 눈앞에서 목도한 사회적 폭력 앞에 자신을 내던졌다. 저항과 죽음으로 쌓아 올린 정의의 시대였다. 1987년 거리로 나온 넥타이 부대는 이들 선봉에 섰던 청년 학우들의 외쳤던 주장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결과물을 얻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90년대 후일담 문학 등을 통해 '정의'에의 헌신은 그 시대의 '진정성'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달라진 시대, 삶의 가치가 변하다

그러나, 시대는 멈추지 않았다. 1997년 우리 사회를 강타한 IMF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회적 경험을 불러왔다. 불황, 대규모 구조조정, 실업을 겪으며 80년대의 사회적 정의는 물질 체제에 기반을 둔 생존주의에 압도당한다. '서바이벌 생존 체제' 속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던 사람들은 20세기를 살아왔던 고통과는 질적으로 다른 고통의 바다를 헤엄쳐가야만 했다.

총학생회장이나 각종 단체의 대표적 위치에 있던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정치에 입문하며 우리 사회 정치의 주요한 세력으로 자리하는 동안, 현장을 지키며 486, 586이 되어가던 사람들은 실존적 고민을 겪어 내야만 했다. 운동권 특채로 대기업에 들어갔던 양석중 씨 역시 이때 퇴직을 했다. 생계를 위해 일용직 노동을 전전했다. 그러다 만나게 된 나무,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비로소 자신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게 되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따라가며 사는 삶, 뒤늦었다 싶었지만 비로소 자신의 방향을 찾은 듯했다.

EBS 다큐프라임 6부작 <진정성 시대>

하지만 모두가 방향을 찾은 건 아니었다. 4부 <나는 잘 살아왔는가?>의 윤남진 씨는 학생운동을 하고 이후 20여 년간 시민단체에서 일을 해왔다. 하나뿐인 딸 윤서는 기특하게 사회 운동으로 바쁜 아빠가 제대로 돌봐주지도 않았는데 어느덧 대안학교 졸업반이 되었다. 술에 취해 감옥 갔던 얘기며 지금까지의 상처를 부여안고 힘들어하는 아빠를 보다 못한 윤서는 아빠가 가고 싶어하던 티벳 불교의 성지를 향한 길에 함께 오른다.

몇년전 위 절제 수술을 받고 낙향한 윤남진 씨. 가정에 소홀했던 아빠는 막상 해발 6000M가 넘는 고갯길을 넘으면서도 딸과의 서먹함이 쉽사리 풀리지 않는다. 아빠는 뭐라고 말을 붙여 보려 하지만 정작 딸은 그런 아빠를 더 어색해한다. 딸뿐만이 아니다. 이곳 티벳에서는 길잡이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지만 그는 정작 고국에서 길을 잃었다.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정의의 마음으로 시작했던 시민단체 일. 이루고자 하는 일은 여전히 요원하고, 벗은 갈라지고 흩어졌다.

오롯이 자신의 내면을 비춘다는 가파른 티벳의 고갯마루를 넘으며 겨우 23살, 30년 전 영문도 모르게 학생운동의 총책으로 잡혀가 혹독한 취조를 받으며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결국은 3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던, 이제는 가끔 되묻곤 하는 그 시간을 다시 꺼내 본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나의 삶이 순탄했을까. 참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는 남진 씨, 주변에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혼자라는 윤서의 아빠. 마음이 단단해지려면 겪어 내야 한다는 고통의 산마루를 넘어서 남진 씨를 안아준 건 유일한 혈육 윤서다.

과정 중심의 진정성

EBS 다큐프라임 6부작 <진정성 시대>

우리 사회에서 진정성이 언급되기 시작한 건 뜻밖에도 예능에서이다. 리얼과 날 것을 탐하며 '진성성'을 추구하던 문화로부터 목표만큼 수단과 과정이 중요하다는 방점이 찍혀진다. 제아무리 미션을 먼저 달성했어도 '꼼수'를 쓴 출연자는 탈락되는 예능의 룰이 어느덧 사회로 확산되어 갔고, 개인에 대한 도덕적 잣대도 점점 더 엄격해져 갔다.

미시간대 교수 로널드 잉글하트는 그의 책 <조용한 혁명>에서 이러한 변화를 '가치관의 변화'라는 흐름 속에서 정의 내린다. 탈권위주의적이고 문화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하게 되는 오늘날 환경보호, 평등, 관용, 공존, 성적 소수주의 등 다양한 가치가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21세기의 진정성이란 무엇인가’란 화두를 두고 수도권 남녀 700명의 사회 인식을 조사했다.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처럼, 사회공헌기업의 제품을 구입하려 하는가, 대의를 위한 일에 동참하는가 등의 사회인식조사를 통해 드러난 최상위 4.3%와 최하위 3.017%의 차이는 현격했다. 하지만 상위 22%, 중위권 35%의 사람들이 사회적 책임과 이타주의, 공존의식, 생태주의에 대한 공감을 표시했다. 공유하고 나누고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났다. 목표중심적인 정치 지향의 진정성도, 먹고사니즘도 극복해낸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이 도래하고 있음을 이 조사는 보여주고 있다.

EBS 다큐프라임 6부작 <진정성 시대>

물론 생태적인 삶의 길이 쉽지만은 않다. 3부 <가고 또 가다보면>은 21세기의 라이프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긴 전직 회계사 김정연 씨의 사례를 다룬다. 31살의 정연 씨는 지난해 전남 영광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 씨가 운영하는 <바우 다른 세상 연구소>에 들어갔다. 인생의 한 시기 불행하지 않고 재밌게 살아내기 위해 '생태주의적인 삶'의 방식을 택했다.

콩 3알을 넣고 100번을 돌려야 하는 맷돌처럼 느리게 가는 삶. 햇살보다 밝은 웃음으로 정연 씨는 대안적 삶의 공동체의 장점을 소리높여 전한다. 그리고 도심 속 네트워크가 공허했던 강동하가 '해야'가 돼서, 상자에서 상자로 옮겨지는 도시의 삶을 견딜 수 없었던 김도희가 '자야'로 공동체의 동료가 되었다. 척박한 산속 만 오천 그루의 가시오가피 나무로 보살피고, 직접 만든 캠핑카로 도시의 전통 시장에 커리를 팔러 나가던 그녀. 하지만 일 년이 지난 후 정연 씨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정연 씨만이 아니다.

그저 꾸준히 하고자 했지만 사소한 생각의 차이가 갈등을 쌓이게 만들어 결국 공동체를 허물었다. 처음이 아니다. 2013년 대안적 삶을 위해 황대권 씨가 만들었던 이전의 공동체도 인건비도 안 되는 수입을 가지고서는 살아낼 수 없어 사라져갔다. 생태주의적 삶의 현실은 그때도 지금도 가혹하다.

의식은 변화하고 있지만 그 의식을 담보해내야 할 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이 대혼란은 또 변화하는 시대를 향한 거대한 용트림일지 모른다. 수척해진 얼굴로, 하지만 정연 씨는 다시 길을 떠난다. 남진 씨도 티벳의 설산을 고통스럽게 완주하며 살아낼 용기를 얻었다.

넓은 원을 그리며 나는 살아가네
그 원은 세상 속에서 점점 넓어져 가네
나는 아마도 마지막 원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 일에 내 온 존재를 바친다네
-넓은 원을 그리며, 라이나 마리아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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