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유럽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는 역사를 소중하게 가꾸고 보존하는 유럽인들의 의식 수준이 대단했다는 것입니다. 종교 건축물부터 조그마한 일상 생활용품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관리하고 보호하고 가꿔나가는 모습들은 오늘날 유럽 사회가 탄탄하게 발전하는 원동력이 됐다는 생각마저 갖게 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스포츠가 일상'인 대륙답게 스포츠와 관련한 다양한 유물 또는 시설물, 기념품들도 곳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경기장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는 위치에 기념관, 박물관 등을 만들어 우승 트로피를 비롯해 일반 팬들이 달고 다닌 조그만 배지까지 기념물, 유물로 남긴 걸 자주 접했습니다. 스포츠에 대한 관심, 사랑이 남다른 면도 있지만 그런 만큼 역사적 가치로 남을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잘 관리하고 남겨 소중하게 가꿔 나가는 그 자세에서 뭔가 모르게 부러움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쌓이다보면 한 팀 또는 국가 스포츠의 역사가 되고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도 오랫동안 남을 수 있는데, 어떻게 보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는 팬들을 보유할 수 있게 된 것이 이런 역사를 잘 가꿔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바르셀로나 캄프 누, 맨체스터 올드 트래포드, 독일 베를린 올림픽 슈타디온 등 유럽 여행하면서 방문한 이 경기장들의 공통점은 바로 역사가 오래 됐다는 점입니다. 짧게는 50년, 길게는 100년이 넘은 역사를 가졌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경기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경기장에 대한 애정, 관심이 대단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특히 이 경기장을 연고로 둔 구단들은 경기장 역사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닌 팀들로 각 리그에서 오랫동안 장수하고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팀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만큼 역대 리그, 대회에 출전해 거둔 우승트로피를 비롯하여 구단을 대표하는 앰블렘, 유니폼 변천, 각 시대별 전설적인 선수들을 소개한 공간들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곳들을 방문할 때마다 마치 '위대한 박물관'에 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는데요. 지역팬들 입장에서는 이런 기회를 통해 팀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고 더 크게 응원하고 지지할 수 있는 힘을 이러한 공간을 통해 얻어가는 듯 했습니다. 그런 힘을 계속 더 크게 키워나가기 위해 탄탄하게 역사를 길러 나가는 그 의식, 자세들이 유럽 스포츠가 꾸준하게 사랑받고 성장할 수 있는 '튼튼한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 견줘 봤을 때 우리나라 스포츠의 역사 관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아 보입니다. 오랫동안 한국 스포츠 발전의 토양이 돼 온 동대문운동장이 사라지는가 하면 시설물이 낡았다는 이유로 무작정 방치하고 새롭게 지으면 모든 게 끝난다는 의식은 수십 년 또는 100년 이상 끄떡없는 유럽 경기장들과는 달라 보입니다. 또 각 구단 뿐 아니라 축구, 야구 등 각 스포츠의 역사물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마저 전무한 것이 '세계 톱10'을 자랑한다는 한국 스포츠 역사 관리의 현주소입니다. 물론 올림픽, 월드컵 기념관이 서울에 있고, 일부 지역 경기장에서 소규모의 스포츠 기념관이 운영되고 있기는 하지만 시설이 빈약하고 당시 역사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역사물, 기념물들이 많지 않은 것은 아쉬움이 남기까지 합니다. 이뿐 아니라 올림픽이나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스포츠 영웅'들의 활약상을 기리고 우리 스포츠의 자부심을 갖게 할 만한 공간도 아직까지는 많지 않습니다.

▲ 축구대표팀 버스
그런 가운데 지난해 경기도 수원에 건립된 박지성 축구센터에 꽤 의미 있는 '유물' 하나를 대한축구협회로부터 기증받고 들여와 화제를 모았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부터 시작해 8년간 축구대표팀의 발이 돼준 축구대표팀 전용 버스가 그 주인공입니다. 한때 폐차도 검토했다는 이 버스는 2002년의 영광을 고스란히 남기고, 축구센터를 찾는 유소년 선수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줄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박지성 축구센터에 기증돼 그대로 전시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기증품이 버스라는 것도 독특하지만 무엇보다 한국 축구의 영광이 묻어있는 소중한 유산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축구계 뿐 아니라 한국 스포츠 기록 문화 발전에도 상당히 의미 있는 기증이라고 봅니다. 버스에는 팬들의 응원 문구, 격려 메시지 뿐 아니라 비판글까지 적혀 있어 그야말로 팬과 선수단이 소통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됐는데요. 단순한 이동 기능 뿐 아니라 선수단과 팬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승리를 염원하는 마음을 생각해보면 정말로 2000년대 한국 축구의 '숨은 소중한 자산'으로도 손꼽을 만합니다. 그런 자산이 2000년대 한국 축구를 빛낸 영웅, 박지성이 운영하는 축구센터에 기증됐다는 것, 그것도 큰 단체에서 한 개인 선수가 운영하는 곳으로 기증이 이뤄졌다는 것 자체로도 박수받을 만한 기증이며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박지성 축구센터 한 쪽에 박지성의 축구인생사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어 꽤 흥미로운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만, 축구대표팀 버스까지 접하게 되니까 이곳에서 축구 선수 꿈을 키우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축구도 배우고, 재미있는 역사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굳이 축구 선수가 아니라도 한국 축구 발전에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는 '잠재적인 축구팬'으로서 의식을 길러주고, 그러면서 자부심을 키우게 하는 데 축구대표팀 전용 버스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직은 부족한 면이 너무나 많아도 이러한 '작지만 의미 있는 사례'를 통해 더 나아가 한국 스포츠 기록 문화가 좀 더 양질적으로 더욱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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