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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진정성을 팝니다, 인스턴트·인터넷 시대의 담론이 된 진정성[미디어비평] 톺아보기
meditator | 승인 2019.10.03 10:59

[미디어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가장이 부인 외에 또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리는 일이 있었고, 이는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묵인된 관습 중 하나였다. 하지만 2019년에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이렇게 한 시대에 별로 문제 되지 않았던 일들이 다음 시대로 오면 지탄의 대상이 되곤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몸살처럼 겪고 있는 문제도 어떻게 보면 바로 이 변화된 시대의 담론으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 '변화된 시대의 담론'과 관련하여 EBS 다큐 프라임이 <진정성 시대> 시리즈를 마련했다. 9월 23일부터 시작하여 10월 2일까지 무려 6부작에 걸친 대장정이다. 

진정성, 그 시작은 진심 어린 사과로부터 

EBS 다큐프라임 <진정성 시대> 1부 ‘진정한 사과’ 편

<진정성 시대>의 시작을 연 건 뜻밖에도 '사과'이다. 왜 사과일까? 지난 2003년 미국의 대표적 언론 뉴욕타임즈는 자신의 신문에 실린 조작 기사에 대한 사과문을 실었다. '잘못이 일어났을 때 바로 잡아라'라는 모토에 따라 독자에게 사과를 한 뉴욕타임즈는 덕분에 정론지로서의 명성과 전통이라는 진정성을 더 강화시키는 계기를 얻었다.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단 한 건의 왜곡된 기사 하나만으로도 뉴욕타임즈의 전통은 무너질 수 있었다. 바로 여기서 진정성으로 통하는 사과의 중요성이 등장한다. 그런데 왜 지금 '사과'일까? 

텍사스대에서 'The science of saying sorry'를 연구하는 티머시 쿰스는 1994년부터 2018년까지의 기간을 대상으로 리서치를 한 결과 꾸준히 사회적으로 사과의 중요성이 증가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소셜 미디어의 확산과 함께 대중 사이에서 각종 사안에 대한 의견들이 빠르게 전파되고 개진되며, 그런 대중이 제시하는 요구와 요청에 대해 리더들이 대답을 해야 했고, 이는 곧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할 일이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성 있는 사과란 어떤 것일까? 나라마다 사과를 말하는 언어가 있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영어를 예를 들자면, 'I am sorry'와 'Apologize'가 주는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다. 흔히 친근한 사이에서 쓰는 말로 알려진 'I am sorry', 그 의미에는 일어난 일을 안타깝게는 여기지만 거기엔 책임 의식이 없다. 반면 'apologize'는 더 잘할 수 있었고 더 잘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내가 한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바라는 진정성은 바로 이 '책임'에서 온다. 

EBS 다큐프라임 <진정성 시대> 1부 ‘진정한 사과’ 편

그러나 사람들은 진정성 있는 사과를 잘 하지 못한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오해하게 했다'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외려 반발을 샀고,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역시 사과 대신 '잘못된 판단'이었다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쫓겨났다. 

왜 이들은 사과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일까?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원인 중 하나는 지나친 자기애에서 비롯된다. 내가 더 현명하고 똑똑하다는 헛된 자존심이 왜 사과를 해야 하냐는 왜곡된 결과를 초래한다. 그 반대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 자기애의 부족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과를 끝까지 피하려 만들기도 한다.

사과는 인간만이 가진 갈등 조정의 수단이다. 그리고 이는 개인을 넘어 국가 간 분쟁과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해결방식이 되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희생자 박물관을 만들고 과거사를 가르치는 등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진심으로 반성하는 실천적 모습을 보여줬다. 거기에 더해 당시 수상이었던 빌리 브란트는 무릎을 꿇고 진정한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전범국가'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졌다. 반면 그 반대의 지점에 일본이 있다. 

일본은 여전히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정치인들이 참배하는가 하면, '통석의 념' 등 애매한 외교적 수사로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으려 애쓴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건, 바로 '피해자'이다. 피해자가 메시지의 중심에 놓여있는 진정성 있는 행동을 하는가가 관건이다. 여전히 일본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가 들끓게 되는 건 바로 그 피해자인 우리에게 일본의 사과가 '진정성 있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과가 진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사과의 수사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는 말에 덧붙여,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겠다는 재발 방지의 구체적인 대안과, 상대방의 피해에 대해 책임지는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말뿐인 사과, 후회는 사과를 받는 상대방의 냉소와 반발을 부른다. 

진정성을 파는 사회

이렇게 소셜 미디어의 발전과 함께 진정성이 더욱 중시되는 것과 달리, 서로 얼굴을 맞대는 일이 점점 드물어지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신뢰'는 더욱 쉽지 않은 일이 되어만 간다. 그러기에 물건을 파는 기업들은 바로 그 사람들이 갈증을 느끼는 진정성을 ‘마케팅의 포인트’로 삼는다. 

EBS 다큐프라임 <진정성 시대> 2부 ‘진정성 마케팅’ 편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파자노, 그곳에 오래된 푸줏간 식당이 있다. 외진 곳에 있는 식당이라 얕보면 안 된다. 전 세계에서 이곳 식당의 고기를 맛보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든다. 8대째 250년, 이제 64세가 된 다리오 체키니 씨가 운영한 지만 44년 된 이 식당의 메뉴는 특별할 것이 없다. 그저 소금을 뿌려 올리브오일을 곁들인 고기가 다다. 그런데 그 고기가 피레네 산맥에서 방목한 소들이다. 그리고 일찍이 '희생된 동물에게 감사하라'는 할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동물이 행복한 삶을 살았느냐 화두 아래, 최고의 재료로 만들어진 '진정성 있는 음식'이 바로 50유로로 살 수 있는 이 식당의 유일한 메뉴다. 

이렇게 21세기는 환경오염이 심해질수록, 음식을 먹는 자와 만드는 자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자연, 천연 등의 진정성을 내세운 '마케팅'이 범람한다. <진정성의 힘>을 쓴 조셉 파인 교수는 바로 이런 인공에 대비되는 '자연스러운 진정성'이 바로 이 시대 진정성의 첫 번째 근원이라 말한다. 

그 자연스러운 진정성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발품을 판다. 경기도 여주의 한 목장, 지난 2006년 소비자와 밀착되는 체험 공간으로 목장을 연 조옥향 씨의 목장에 주말마다 기억에 남을 수 있는 '대리만족'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몰린다. 

EBS 다큐프라임 <진정성 시대> 2부 ‘진정성 마케팅’ 편

거기에 가격까지 착하면 금상첨화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DIY 가구의 대명사가 된 스웨덴의 가구 회사는 '합리적 가격'을 마케팅 포인트로 하여 소비자가 직접 만드는 '플랙팩 시스템'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 스스로 부엌용 식탁을 영업용 책상으로 알뜰하게 살아왔던 잉바르 캄프라드 회장의 '가격은 진정하다'는 모토를 위해 오늘도 이 회사는 합리적인 소비를 위한 연구를 거듭한다. 

또한 진정성은 '시간'의 마력에 기댄다. 아직도 전통 방식의 오크통을 고집하고, 처음 사용했던 샘물로 '단일적 영감'을 광고하는 스코틀랜드의 싱글몰트 위스키라든가, 나폴레옹이 다녀가고 헤밍웨이가 찾던 그 시절의 모습을 유지하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가장 오래된 카페의 '보수성'은 진정성의 또 다른 원천이 된다. 아니 라스베이거스에 재연된 베니스처럼 '오리지널리티'를 흉내라도 내야 한다. 

이렇게 인스턴트의 시대, 인터넷의 시대,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진정성'을 갈구한다. 진정성이 있는 물건을 소비하고, 자신들의 요구와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리더를 원한다. 그리고 그 요구에 맞추지 못했을 때 진솔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지도자를 기대한다. 멸종한 진정성에 대한 '노스텔지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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