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 녹차를 좋아하시나요? ★★★★

녹차 같은 영화, 만추

익히 알려졌듯이 <만추>는 몇 차례 리메이크가 됐던 영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만 이번까지 세 번, 일본에서도 한 번 만들어졌으니 총 네 편의 영화에 <만추>의 유전자가 전이됐습니다. 헌데 정작 원작인 이만희 감독의 <만추>는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보려야 볼 수가 없습니다. 원본 필름 자체가 증발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 세대가 아닌 저로서는 원작과의 비교는커녕 유추조차 해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1969년생 김태용 감독이 리메이크의 대상으로 삼은 영화는 김수용 감독의 <만추>일 확률이 아주 높아 보이지만 말이죠.

국적이 다른 두 명의 배우를 기용한 <만추>를 직접 보니 개봉이 연신 미뤄진 이유를 알겠더군요. 막장과 신파가 난무하는 작금의 세대가 보기에는 호흡이 느려도 너무 느리고, 감정의 자극은 무뎌도 매우 무딥니다. 한 마디로 놀라울 지경이에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마저 두동강을 내버릴 예리한 칼도 무용지물일 수 있는데, 두부도 자를 수 없는 무딘 칼로 서서히 관객의 가슴을 썰고 있으니, 어쩌면 <만추>는 시대를 역행하는 연출로 빚은 영화일지도 모릅니다.

완성도를 떠나 흥행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다면 - 안타깝지만 그렇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 그 원인은 상당부분 여기에 있다고 보입니다. 가뜩이나 자극에 둔감해진 이들에게 이렇듯 평탄한 전개는 흥미를 얻기 힘듭니다. 도리어 지루함만 가중시키고 결말에 이르면 "이게 뭐야?"라고 투덜거릴 테죠. 그래서 <만추>는 달콤쌉싸름하고 어디서나 간단하게 마실 수 있는 커피가 아니라, 시간을 두고 천천히 우려내면서 음미해야 진가를 알 수 있는 녹차에 가깝습니다.


Tang Tang Tang

2011년의 <만추>는 오롯이 애나의 감정을 따라가는 듯한 연출로 일궈졌습니다. 동시에 <만추>는 애나의, 탕웨이의 영화입니다. 물론 현빈의 연기도 나쁘진 않습니다. 그가 연기한 훈이란 캐릭터를 감안하면 어설픈 영어발음은 역할에 보다 충실한 재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탕웨이의 연기가 이 이상은 불가능할 만큼 완벽합니다.

<만추>의 두 주인공은 공히 대사가 적은 편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애나는 언어를 상실한 사람처럼 극히 말을 아낍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탕웨이에게서 요구되는 것은 결국 내면연기입니다. 파급의 반경이 큰 말과 행동이 아닌 표정과 몸짓으로 연기를 하고, 그 연기에 감정을 싣는 것으로 관객에게 캐릭터의 심연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죠. 바로 이것을 탕웨이는 기가 막힐 정도로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극초반부터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있어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탕웨이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자신이 연기하는 애나를 100%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합니다.

탕웨이의 연기가 어찌나 훌륭했던지 현빈의 그것은 자취를 감춰버립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존재감이 미미합니다. 사실상 <만추>의 내러티브 자체가 애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훈이 튈 이유 또한 없긴 합니다. 현빈이 아니라 그 누가 훈을 연기했다 하더라도 조연의 역할에 그쳐야 임무를 완수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허나 반대로 보자면 이 점이 <만추>의 맹점으로도 작용합니다. 애나에 비해 상대적으로 훈의 심리를 표현하고 반영하는 것에는 적잖이 소극적입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평행선을 그렸다면 더 좋았을 텐데... 훈은 애나를 보조하는 데 목적을 둔 캐릭터입니다.


안개 속의 풍경

애나는 남편을 살해한 죄로 복역하던 중 어머니의 부음을 접합니다.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사흘간의 외출을 허락받고 시애틀로 향하는 버스에서 훈을 만나죠. 이 남자는 처음 본 여자에게 다짜고짜 차표를 사게 돈을 빌려달라고 합니다.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를 계기로 애나와 훈 사이에는 작은 연결고리가 생깁니다. 시애틀에 도착하자 훈은 한사코 사양하는 애나에게 빌린 돈을 꼭 갚겠다며 자신의 시계를 채워줍니다. 그 순간부터 오래 전에 멈춰있었던 애나의 시간(감정)이 다시 흘러가기(되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정확히 애나의 시간이 언제 멈췄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이를 떠나보냈던 때인지, 그가 없어 비워진 공간을 채우고자 택했던 남자를 죽였던 때인지, 혹은 살인죄를 선고받고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면서인지... 어쨌든 어느 순간에도 속하지 못한 채 정지해 있던 애나의 물리적, 심리적 시간은 어머니의 죽음과 훈의 다가섬으로 인해 다시 초침이 움직입니다. 주어진 시간이 사흘에 불과해 결말이 짐짓 예상되는, 그래서 좀처럼 맘을 열지 않는 애나의 시계는 과연 계속 움직일까요, 또 다시 멈춰버리게 될까요?

<만추>의 이야기는 주로 시애틀에서 이뤄집니다. 정확하게는 '늦가을'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가을의 시애틀인데, 희뿌연 안개와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낙엽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만추>에서는 낙엽이 다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가 아니라, 안개 속에서 스산하고 차가운 기운을 지닌 도시의 풍경이 애나의 심리를 대변합니다. 최대한 톤을 다운시킨 화면도 메마르다 못해 굳을 대로 굳어버린 애나의 삭막한 내면과 어우러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통역이 필요 없어요

<만추>에서 인상 깊었던 세 개의 장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애나가 자신의 과거를 훈에게 털어놓던 장면입니다. 이때 애나는 중국어로 말하지만 훈이 아는 중국어라곤 고작해야 '좋다, 나쁘다'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둘이 주고받는 대화(?)가 그럴듯합니다. 애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훈의 맞장구가 적절하게 맞아떨어졌던 것이죠. 흔히 하는 말로 언어의 장벽을 넘어 진심이 통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훈이 애써 애나의 표정을 읽었던 것일까요?

두 번째는 훈과 애나가 범퍼카를 타다 말고 한 연인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장면입니다. 훈은 이들을 보며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남자는 헤어지고 싶어하는데 여자가 쉽사리 그를 보내주지 않는다는 내용을 일인극으로 묘사하죠. 애나 역시 멀리 보이는 남녀의 상황에 자신의 심경을 대입한 듯한 대화를 덧씌웁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아마 여자가 "변한 것은 내가 아닌 당신이다"라는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닿을 듯 닿지 않는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고, 곧이어 함께 춤을 추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아마도 애나의 바람이 투영된 장면이었겠죠?

세 번째는 애나가 한때 사랑했던 남자 왕징과 훈이 장례식 후에 식당에서 만났던 장면입니다. 훈을 견제하는 왕징은 애나를 위해주는 것 같지만 정작 애나는 왕징으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왕징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에게 훈이 말합니다. 자기는 애나를 웃게 해주는데 넌 뭘 해줄 수 있냐고... 한 여자를 놓고 시작된 대화는 끝내 몸싸움으로 번집니다. 이 싸움의 결말이 참 웃기고도 재미있습니다. 그놈의 포크 덕분에 애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징에게 울분을 토해냅니다. 이것이야말로 훈이 애나에게 해준 최고의 선물입니다.


One Last Kiss

훈과 애나의 만남은 한정된 시간에 갇혀있습니다. <만추>가 수차례 리메이크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불가항력에 맞서지 못한 채로 끝이 보이는 남녀의 관계에 애틋한 감정을 녹여내고 싶었던 것이겠죠. 김태용 감독의 <만추> 또한 애나가 탈주범이 되지 않는 다음에야 두 사람은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헤어져야 할 운명입니다.

애나에게, 아니 애나와 훈에게 주어진 사흘의 시간이 흘러가고 두 사람은 열정적인 키스를 나눕니다. 이 한 번에 서로가 서로에게 가진 감정을 모두 쏟아붓기라도 하는 듯이 긴 키스를... 이것으로 애나의 멈춰졌던 시간은 고동치는 심장과 함께 힘차게 흘러가기 시작했음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잊고 있던 여자로서의 모습을 되찾고 싶어 한껏 치장했다가도 이내 벗어던졌던 것과 달리, 이제 진정으로 다시금 삶을 간절하게 이어가길 원합니다. 그렇게 애나는 가을의 끝자락에서 만난 훈으로 인해 매서운 겨울의 추위를 극복하고 쏟아지는 햇살과 생명력이 넘치는 봄을 맞이했습니다. 길고 긴 여운을 남기는 엔딩 크레딧은 관객에게 "그것이 정말 봄이었을까?"라는 물음을 던지지만 말입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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