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바우두' 설기현은 한국 축구의 역사를 빛낸 영웅 가운데 한 명입니다. 유럽 무대에 진출한 선수가 많지 않았던 1990년대 후반 벨기에 주필러리그에 진출해서 성공적으로 유럽무대에 진출한 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까지 밟으며 성공 가도를 달렸던 선수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설기현이었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16강전 이탈리아전에서 8강 진출의 신호탄을 쏜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하며 '영웅'으로 떠올랐고 2006년 독일월드컵 때도 프랑스전에서 박지성 동점골의 시발점이 된 날카로운 측면 돌파와 크로스로 강한 인상을 남긴 바 있습니다. 어쨌든 프로 선수로나 국가대표 선수 모두 전반적으로 탄탄대로를 걸었던 몇 안 되는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풀럼 FC를 끝으로 유럽 생활이 끝난 뒤 설기현의 행보는 이전과 다르게 너무나 조용했습니다.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해 재기를 모색했지만 부상으로 전반기 내내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줄 기회도 얻지 못하다 결국 3회 연속 월드컵 본선 출전이 좌절됐습니다. 재기를 위해 이후에도 끊임없이 노력을 펼쳤지만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결정적인 실수로 팀의 4강 진출을 날리며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설기현 개인이나 포항 입장에서는 참 아쉬운 한 해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 2010.7.10 K-리그 포항 스틸러스와 전남 드래곤즈의 경기에서 포항의 설기현이 슛을 날리고 있다 ⓒ연합뉴스
너무나도 조용한 한 시즌, 그리고 K-리그 데뷔를 했던 설기현은 두 번째 해에 새 출발을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길은 포항과의 재계약이 아니라 바로 다른 팀으로의 이적, 바로 울산 현대로 새 둥지를 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뭔가 모르게 매끄럽지 못한 듯 설기현의 이적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있습니다. 설기현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과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 팀을 배신하고 갔다는 생각이 대립하고 있는 양상입니다. 분명한 것은 설기현의 이적이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하다는 생각은 공감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프로 선수인 만큼 더 나은 환경에서 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를 꺾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욱이 계약이 끝났던 가운데 새로운 팀을 모색했던 것이니 선수가 다른 팀을 자유롭게 떠나는 것은 프로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환경이나 조건 모두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면서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재기를 모색하려 하는 것은 분명히 선수 개인이나 리그 전체적으로도 좋은 일인 게 사실입니다.

과거 이동국이 잉글랜드 무대 진출에 실패한 뒤 성남 일화에서 잠시 뛰다 전북 현대로 곧바로 이적해서 성공한 케이스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물론 지난해 월드컵 때 다소 아쉬운 결말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2009 시즌에 좋은 활약을 펼치며 소속팀 우승에 견인차 역할도 하고, 국가대표팀에 잠시나마 힘을 불어넣은 것은 이적의 좋은 사례로 꼽을 만합니다. 어떻게 보면 설기현이 30대의 나이에 재기를 하는 데 있어 모델로 삼아볼 만한 케이스이기도 합니다. 새 환경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자신이 목표했던 바를 이룬다면 그만한 '이상적인 부활 모델'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설기현과 이동국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동국은 어느 정도 기존 팀과 새 팀과의 교감이 있었던 가운데 무대를 옮겼던 반면 설기현은 그런 과정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새 시즌 개막이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가운데 이적할 것이라는 뉘앙스조차 풍기지 않다가 감독과 연락을 끊고 새 무대로 옮긴 것 자체가 그다지 곱게 보이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특히 포항 감독이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투톱 파트너였던 '선배' 황선홍이라는 점에서 더욱 안타깝게 보입니다. 설기현이 울산으로 자리를 옮긴 뒤 황 감독과 연락이 두절됐다는 소식을 보면 '꼭 그렇게 해서라도 뒷마무리가 개운치 않아야 했을까'라는 의구심이 듭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황선홍과 설기현 모두 당시는 특별한 기억을 갖고 있는 선수들이었습니다. 설기현은 생전 처음 월드컵 무대에 나섰음에도 잇단 실수에 조별 예선에서 고개를 떨굴 뻔하다 이탈리아전 동점골로 화려하게 떠올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황선홍은 이전 월드컵에서 잇달아 쓴맛을 보다 1차전 폴란드전에서 화려한 터닝슛으로 골을 집어넣으며 단숨에 부활, 월드컵 신화의 신호탄을 쏘며 맹활약했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선수 모두 8강 스페인전 승부차기에 1번(황선홍), 3번(설기현) 키커로 나서 골을 집어넣어 4강 신화의 주역이 되기도 했습니다.

활약상도 활약상이지만 설기현이 실수를 할 때 황선홍이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모습은 '선-후배 사이가 참 좋아 보인다'라는 생각이 날 정도로 훈훈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었기에 '사-제 지간'으로 만난 둘의 올 시즌이 왠지 모르게 기대감이 컸던 게 사실이었고, 황선홍 감독 입장에서도 특별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설기현이 어떤 교감도 없이 홀로 새 시즌 개막을 얼마 안 남겨둔 시점에서 다른 팀으로 이적을 한 것은 당연히 황 감독 개인이나 포항팬들을 떠나 축구팬 전체적으로도 그다지 고운 시선을 보낼 리 없는 게 사실입니다. 축구 선수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기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한 2002 월드컵 당시 많은 도움을 줬던 선배, 그리고 재기를 위해 받아준 팀에 이렇다 할 말도 없이 개운치 않게 떠난 게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적 의사는 존중한다 할지라도 그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것이 바로 설기현을 향한 비판의 핵심이라는 얘기입니다.

어찌 됐든 설기현은 울산 현대로 이적을 했습니다. 포지션이 겹쳐 주전 경쟁이 불가피한 포항보다 울산이 더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하지만 그 팀 역시 김신욱, 고창현 등 전문 스트라이커와의 경쟁이 불가피한 게 사실입니다. 더 깊은 속사정을 들어봐야 하겠지만 영남 축구 라이벌로 꼽히는 포항 스틸러스와 울산 현대 호랑이 입장에서 '더비'를 엮을 만한 이야깃거리 하나가 나왔다는 정도가 그나마 이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설기현의 이적은 여러 가지로 아쉬운 면이 남는 이적이었습니다. 설기현의 선택이 과연 옳았는지는 바로 올 시즌 활약상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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