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하기 참 쉽다고 해야 할 것 같다. KBS 단독 보도 이후 여론의 관심을 단박에 집중시키고 대중적 열기를 동시에 동반하고 있는 하나의 아이템을 보면 그렇다. '단독', '특종'을 할 수 있는 비법도 세상에 공개됐다고 해야 할까. 골치 아프게 사실 확인하고 또 조심할 필요도 없는 그런 아이템이다. 내키는 대로 소설을 써 재껴도 무방하고, 상황은 누가 '창작'을 잘 하느냐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어 보일 정도다.

▲ 지난 15일 KBS는 단독보도라며 김정일 위원장의 차남인 김정철이 싱가포르에서 에릭 클립톤의 공연의 관람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KBS는 15일에 이어 16일에도 관련 소식을 헤드라인으로 편성하는 등 공세적으로 보도했다.
단독, 특종 비법 대공개!

소문난 잔치가 그렇듯 별 다른 비법은 아니다. 간단하다. 싱가포르를 주목하기만 하면 된다. 김정철이 싱가포르에 있다는 사실을 단독 보도한 KBS는 "김정철이 공개 석상에서 서구 언론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지난 2006년 이후 5년만이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조선일보에 따르면, 김정철은 작년에만 해도 무려 4차례나 싱가포르를 방문했다고 한다.

싱가포르에 자주 오는 이유와 동선도 다 노출됐다. 싱가포르는 북한과 정식 수교를 체결하고 있는 나라이고, 베이징이나 마카오와는 달리 중국 정보기관에 노출될 우려가 적은 국가이기도 하다. 김정철 뿐만 아니라 북한 최고위층 인사들의 방문이 유난히 잦다고 하니 싱가포르를 주목하고 있다보면 조만간 또 누군가 걸릴 것이다.

더 구체적인 팁을 알려주겠다. 김정철이 방문했을 때 주로 묵는 곳은 '팬 퍼시픽 호텔'이나 '호텔 세인트리지스' 등 하룻밤 숙박료가 60~100만원에 이르는 최고급 호텔이다. 낮에는 아이온(ION), 파라곤(Paragon), 타카시마야 등의 고급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밤에는 센토사 월드 카지노나 샌즈 카지노에서 도박을 즐긴다고 한다.

움직일 땐 북한 대사관 직원들의 경호를 받으니 쉽게 눈에 띌 것이다. KBS에 따르면, "에릭 클립턴의 열혈 팬"이라고 하니 그의 공연 일정을 살피는 것도 특종을 맞춤 할 수 있는 한 방법이다. 김정철은 지난 2006년에도 에릭 클립턴의 공연을 관람했다. 실제, 싱가포르의 한 교민은 김정철은 물론 김정남도 자주 본다고 한다. 싱가포르에 취재원을 두고 꾸준히 관리하며, 이상 징후가 보일 때 연락만 좀 해달라고 하면 당신은 한국을 주무를 수 있는 특종을 할 수 있다.

KBS는 당신의 질투를 즐기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기자라면, KBS가 김정철의 싱가포르 방문을 '단독'으로 '특종' 보도하며, 엄청난 호들갑을 떠는 것에 심한 아니꼬움을 느꼈을 것이다. 속으로는 '김정철의 동정이 단독 보도할 특종 꺼리냐?'는 빈정거림이 치밀었을 수도 있다. 개 중에 격정적인 성격이라면, 이틀 연속으로 관련 뉴스를 톱에 배치하고 연달아 3꼭지씩 관련 보도를 펼치는 것을 보고 '해도 너무한다' 싶어 분통을 터뜨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티 팬도 팬이라고 내심 부럽기도 하고, 북한 지도층의 경우 워낙 베일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그중 한 명이 공개된 것을 따라가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KBS 보도국은 이런 당신의 질투를 즐기고 있다. KBS의 민경욱 앵커는 "현장에서 그 사실을 취재해온 후배 기자가 자랑스럽습다"며 KBS 보도국의 우월한 분위기를 뽐내기도 했다. 오랜 만에 KBS 뉴스가 정국을 주도하고 여론을 이끄는 상황 사실 자체에 고무된 표정이 역력하다.

김정철이 왜 싱가포르에 갔느냐고 더 묻지는 말자

더 이상 질투하지 말자. 왜 김정철이 싱가포르에 갔느냐고 따지지 말자. 소설 쓰지 말자. 옆에 있던 여자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실력으로 그가 '권력에서 밀려나 외유 한다'는 둥, '인민은 굶는데 최고위층은 명품 쇼핑이나 한다'는 둥의 가십성 기사를 양산해내지 말자. 북한이 왕정국가이고, 비정상 국가임은 틀림없지만, 그럴수록 더욱 김정철은 위치는 독보적이다.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 수교 국가에 가서 공연을 볼 수도 있는 것이고 쇼핑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국내만 하더라도 몇 년 전에 이건희 회장이 유럽의 스키장을 통째로 빌려 활강 연습을 했는데 절대 왕정 국가의 아들이 그 정도 호사스러움을 누리는 것이 뭐 큰 충격은 아니잖은가.

▲ 김정철이 자주 들르는 싱가포르의 시설들을 지도로 만든 16일자 조선일보 사진 캡쳐. KBS의 단독 보도 이후 국내 언론들은 일대 혼란에 빠진 모습을 보였다. 특히, 조선일보의 상심은 매우 커 보였다. 김정철 옆에 있던 이가 누구인지조차 식별해내지 못하는 실력을 보인 국내 언론들은 그러나 과감한 추정 보도를 통해 사건을 확대 재생산해냈다.
일단 접자. 그만 보도하자. 북한 문제 특히 김정일 부자 세습 문제에 전력해 온 조중동 입장에서 입맛이 다셔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애석함이겠지만 버스 떠났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건데 이번 사건은 북한의 권력 체계 변화와 별 접점을 갖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 생활로 판단된다. 만약, 김정철이 권력에서 밀려나 외유 중이었다면 이렇게 곧장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이번 문제의 경우 북한 최고위층 자제가 노는 모습을 포착해낸 비본질적 우연에 불과하다.

그가 에릭 클랩톤의 공연을 봤다는 것이 '권력에 무심하다'는 증거일 수 없고, 김정남이 외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그의 해외여행도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추론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뿐이다. 몇 년째 죽어있던 KBS 뉴스가 북한 관련 소식으로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뭔가 해야 한다'는 조급증과 강박에 잠기는 것을 경계하자. 부러우면 지는 거다. 그 조급증과 강박에 젖어갈수록 저널리즘은 황색이 된다.

KBS가 취재 열정을 국내로 뻗칠 그 날을 기다릴 수밖에

끝으로 무려 단독으로 특종을 해낸 KBS에게 아낌없는 축하는 보낸다. 여러 언론들에게 어떻게 하면 MB 시대에 부합하는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지의 큰 모범을 보였다. 이래저래 국내에도 보도할 것이 많았을 텐데, 그런 것들은 질끈 무시하고 해외로 시선을 돌린 발상의 전환이 이뤄낸 쾌거라 아니 할 수 없다. 그 열정과 관심이 낙동강의 수질 오염 문제에도, 수도꼭지에서 구제역 침출수가 나오는 상황에도, MB의 최측근이 함바집 비리에도 연루된 사실에도 뻗친다면 좋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하루 이틀 문제도 아니고 말이다. KBS가 취재 열정을 국내로 뻗칠 그 날을 기약없이 또 기다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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