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엄혹한 시기였던 80년대의 집회 시위 규모는 몇 만이냐 몇십만이냐의 문제였다. 이제는 100만이냐 200만이냐를 셈하며 논쟁하는 시대가 됐다. 세상이 좋아진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복잡한 심경이다.

어쨌든 ‘조국 수호’의 피켓을 들고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집회 참가자가 2016년 촛불집회 이후 최대였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 정도 되면 집회 참가 인원이 몇십 만인지 아니면 몇백 만인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기상청이 예상 적설량을 10센티미터 이상라고 하면 그저 눈이 엄청나게 많이 온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과 비슷한 얘기다.

보수세력은 ‘관제집회’를 말한다. 집회 참가자 다수가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로 생각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지난 대선을 거치며 더불어민주당은 지지자들과의 결합 정도를 준당원 수준으로 높이는 데 성공했다. 실제 촛불집회 참여에 열성적이었던 사람이 당원으로 가입한 경우도 많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더불어민주당은 과거와 비교해 좀 더 대중정당(mass party)화 됐다고 볼 수 있다. 집회 참여가 대중운동단체가 아니라 특정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중심으로 이뤄진 것은 크게 볼 때 이 맥락 안에 있다.

물론 보수세력의 묘사처럼 이들이 어떤 조직적 결정에 따라 ‘동원’됐다고 볼 수는 없다. 이들의 성향이 집권여당을 지지한다는 것과 조직적 동원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28일의 집회는 예비 총선출마자나 당직자 및 지역의 조직책임자들이 동원되는 자유한국당의 장외 집회와는 분명히 달랐다. 즉, 이들은 ‘자발적’으로 조직화됐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따지는 것은 정치 비평의 영역이다.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중앙지검 앞에서 열린 검찰 개혁 촛불 문화제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현대 민주주의에서 대중의 직접 행동은 무언가에 대한 요구보다는 ‘반대’하는 차원에서 이뤄진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를 요구한다는 것은 ‘독재정권에 반대한다’는 명확한 반대논리가 있어야 가능해진다. 2017년 조기 대선을 가능케 한 촛불집회 역시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의한 통치를 반대하자는 것이었다. 이른바 ‘운동권’들은 습관적으로 자신들이 선호하는 의제를 말하며 “촛불의 명령”이라고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이야말로 이러한 반대 논리의 실천적 결론이었다. 28일의 시위도 마찬가지다.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검찰의 과잉수사와 이를 주도하는 인물로 비춰지고 있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전횡에 반대한다는 것이고, 이의 실천적 결론이 ‘조국 수호’인 것이다.

본질을 보려면 이 반대 논리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 ‘촛불시민’의 검찰개혁 요구는 2009년의 비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는 기득권 세력과의 외로운 싸움을 대중이 외면한 결과로 받아들여졌고 사람들의 마음에 정치적 죄책감을 남겼다. 이를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의심할 수 없는 ‘진정성’은 ‘열광’의 대상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구이고 이 진정성의 구현자라는 점에서 기득권 ‘적폐’들과 대립하는 상징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자신의 공직 활동을 ‘앙가주망’으로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튜브 언론인’을 비롯해 집권여당 주변의 주요 인물들은 그간 조국 법무부 장관을 문재인 대통령 또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동일시하는 차원의 발언을 계속해왔다. 예를 들어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강행은 대통령의 ‘인사권’ 문제였다. 검찰의 언론과 정치권을 통한 피의사실 공개는 지속적으로 ‘논두렁 시계’와 비교됐다. ‘11시간 압수수색’과 ‘짜장면’으로 상징되는 검찰의 조국 법무부 장관에 대한 수사는 정당성 없는 수단으로 정권에 반기를 든 ‘쿠데타’로 규정됐다. ‘유튜브 언론인’은 지금도 “과거(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처럼 후회하기 싫어서 나섰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논리에 따라 ‘조국=문재인=노무현’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강행한 데 이어 27일 “검찰이 전력을 기울이다시피 엄정하게 수사하고 있는데도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검찰은 성찰해주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내놓은 것은 이 논리에 대한 ‘보증’이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권리를 위임해 드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시작으로 이 정권의 지지자들은 이제 속거나 이용당할 걱정 없이 검찰에 반대할 수 있게 됐다. 28일의 100만, 150만, 200만 집회는 이 대목에서 앞서의 조직된 대중이 응답한 결과이다.

이러한 세태가 가져오는 문제는 없을까? 보수언론은 거리의 정치가 법치를 위협하고 있다는 식의 프레임을 내밀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주변적 문제에 불과하다. ‘100만 촛불’은 문재인 정권의 ‘진정성 관철’을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겠다는 식의 정치 논리를 체화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세계관에 의하면 정치적 정당성이나 어떤 도리, 금도를 따지는 것은 결과적으로 권력을 잃고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2009년의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무슨 수단을 써서든 권력을 유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선 어떤 ‘개싸움’도 감당할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이 결과 남는 것은 오로지 이해득실과 손익계산이 정치의 본질이 되는 냉소적 세계관이다. 여기에는 어떤 가치판단이나 대의명분이 설 자리가 없다. 다들 어떤 당위를 내세우는 것 같지만 실제 가치와 명분은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 세계관에서 앞서의 ‘열광’은 ‘각자도생’과 동전의 양면을 구성한다.

걱정스러운 것은 이렇게까지 했는데 결과적으로 이 정권 역시 개혁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게 된 경우다. 개혁의 관철은 곧 앞서 본 ‘기득권에 반대하는 진정성의 구현’으로 대체되었으므로 ‘100만 촛불’은 기성의 한도를 넘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이미 그런 정치가 세계를 휩쓸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진보와 보수, 중도의 영역을 막론하고 이런 정치를 향하는 에너지는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있다.

파국을 막기 위한 대안적 정치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세력은 찾기 어렵다. 이 사실이 ‘100만 촛불’이 만들어 낸 ‘장엄한 광경’을 기쁘게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대안적 정치를 자처하면서 아직 “촛불의 명령”을 말하고 싶은 자들이 있다면 2016년부터의 상황을 다시 복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본질을 직시하며 냉혹한 자기평가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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