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EBS에서 방송한 <다큐 10> ‘유럽의 극우 정치가들’ 편은 음악이 정치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나약한 것들을 음악으로 모두 불살라 버릴 것이다.” 프로그램 서두에 인용된 나치 선전상 괴벨스의 말이다. 괴벨스는 1933년 11월, ‘제국문화협회 창립문’에서 “독일 음악은 낭만적이고 비밀스런 운명의 힘을 과시하는 한편, 사람들의 ‘영적 투쟁’을 ‘전투적 행동’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히틀러가 가는 곳마다 베토벤과 바그너의 웅장한 관현악이 울려 퍼졌고, 그 음악은 어떤 연설보다 더 강하게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했다. 음악에는 듣는 이의 피를 끓게 하는 힘이 있다. 20세기 최대의 비극인 홀로코스트는 음악의 힘과 게르만 민족주의가 시너지를 일으켜서 생긴 재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음악 자체가 재앙일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음악은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고, 어떤 음악을 쓰느냐에 따라 상황 자체가 다른 색채를 띨 수 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프랑스의 극우 정치가 장 마리 르펜의 연설에 군중들이 열광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 사용된 음악은? 헨델의 D단조 ‘사라방드’였다. 비극적이고 엄숙한 느낌을 주는 곡이다. 감독은 극우 선동가에 대중이 휩쓸리는 현상이 ‘재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반대로 바그너의 <탄호이저>, <리엔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같은 곡을 넣었다면? 정반대로 르펜을 열렬히 찬양하는 효과를 낳았을 것이다. 정치 집회에서 음악 하나가 분위기를 좌우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큐멘터리에서도 음악 하나가 내레이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인류를 위하여 향기로운 포도주를 빚는 바쿠스이다. 사람들에게 거룩한 도취감을 주는 것은 바로 나다.” 이건 베토벤의 말이다. 사람을 도취하게 하는 음악의 위대한 힘, 그것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좋다. 해마다 연말이면 온 인류가 함께 듣고 열광하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만 보자.

▲ 히틀러의 탄생 전야를 기념해 열렸던 베토벤 특집 음악회에서 카라얀
히틀러도 당연히 이 곡을 좋아했다. 1942년 4월 19일, 히틀러 생일 전야 특별음악회에서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이 곡을 연주했다. 나치주의자들은 이 음악이 말하는 ‘형제애’의 세계를 게르만족 공동체로 해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 참조: http://blog.naver.com/hhklk0112/60041831017 )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포츠담 광장에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같은 악단이 이 곡을 연주했다. 음악은 같았지만 ‘환희의 송가’ 대신 ‘자유의 송가’로 제목을 바꾸는 등 손질을 했다. ‘공산주의의 종말과 자본주의의 승리’로 재해석했다고 볼 소지를 남긴 것이다.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할 당시의 ‘형제애’는 아마도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우애에 바탕한 ‘형제애’였을 것이다.

음악가의 ‘부역’ 문제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그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올해 탄생 100년을 맞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다. 그는 모든 지휘자들 중 가장 널리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고, 탁월한 연출자, 행정가, 사업가였다. 클래식 음악을 조금이라도 들어 본 20대~ 50대 사람들은 어릴 적 그가 지휘한 베를린필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 중 한두 곡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의 음악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가 남긴 방대한 레코딩을 특징짓는 키워드를 전문가들도 찾지 못하고 있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의 재능과 카리스마를 ‘음악’이라는 하나의 정점으로 몰아넣어서 엄청난 업적을 남겼고, 사업가적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고, 여러 사람들의 찬탄을 받았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질시와 비판을 받아 왔다는 점이다.

그는 1933년 나치의 유태인 탄압이 시작되자마자 나치에 입당했고, 2년 뒤 아헨에서 음악감독에 취임한 뒤부터 노골적으로 나치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점령지 파리에서 베를린 오페라를 이끌고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지휘하는 동영상이 남아 있다. 심지어는 나치 제복을 입고 지휘했다는 증언이 있다. 그는 전후 자신의 전력이 도마에 오르자 1935년, 취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입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1942년 유태계의 피가 흐르던 아니타 귀터만과 재혼할 때 나치를 탈당했노라고 밝혔지만 그 또한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를 잘 알던 피아니스트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는 이러한 비판이 “그를 시기하는 다른 지휘자들이 확대해서 퍼뜨린 얘기”라고 일축한다. 역사가 올리버 로트콜프는 “카라얀은 자신이 나치 선전에 이용당한다는 정치 사회적 의미를 몰랐던 것 같다”고 진단한다. 구체적으로 카라얀이 나치 찬양 발언을 했다는 기록은 아직 보지 못했다.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카라얀의 나치 경력을 여기서 따질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나치가 바그너와 베토벤 음악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듯 카라얀이란 음악가를 이용했을 수 있다. 카라얀도 자기의 음악 활동을 위해 나치와 타협했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홍난파나 안익태도 친일 혐의로 입에 오르내리는데, 단지 그 사실 때문에 이 분들을 지금 단죄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나치에 반대했던 토스카니니는 위대한 음악가고 나치에 부역했던 카라얀은 나쁜 음악가”라는 식으로 얘기할 수도 없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규명과 솔직한 인정, 적절한 반성, 그리고 용서와 포용이 필요할 것이다. 그 바탕에서 음악가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따르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는 1989년 세상을 떠났다.

패전 이후 2년 동안 지휘 활동을 할 수 없었던 그는 1947년 복권됐고, 그 뒤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 1954년에는 푸르트뱅글러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의 종신 지휘자가 된다. 그리고 30년 이상 세계 최고의 관현악단인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고 전세계 레코드 시장의 총아이자 지휘계의 황제로 확고한 명성을 쌓았다.

그의 생애에 대한 평가는 이제 역사가의 몫으로 남겨졌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대해서는 열렬한 찬탄과 비판이 지금도 나란히 존재한다. 어찌됐건 그의 음악은 레코드의 타이틀 - His Legacy for Home Video - 처럼 집집마다 그의 유산으로 남아 있다.

* 카라얀의 나치 전력에 대해서는 파트리샤 플라트너 감독의 다큐멘터리 <마에스트로, 마에스트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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