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전쟁에 대비한 새로운 교통기술로 개발되었다고 하더라도, 인터넷은 인ㆍ민의 입장에서도 참 유용한 매체기술이다. 선전과 홍보, 거짓이 난무하는 채널이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잘만 활용하면 새로운 사실을 긁어내거나 억압된 진실을 표현할 수 있다.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선전을 끝낼 수 있다'는 맥루한의 변증법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게 인터넷이다. 요컨대 인터넷은 자본과 국가 권력에게도 편리하지만, 대중의 입장에서도 매우 실리적인 그런 이중적 잠재성의 매체다. 벤야민이 살아있다면, 그의 매체철학은 더 이상 영화가 아닌 인터넷이 어떻게 생활과 예술, 소통의 양식을 근원적으로 변화시켰는지에 집중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동네 피씨방에 들러 열심히 게임을 즐기는 아이들 속에서 후닥닥 뉴스를 따라잡고 또 칼럼을 쓸 수 있는 것도 인터넷 덕택 아니겠는가. 인터넷, 참 대단한 ‘비평의 무기’다. 즐거운 놀이 공간, 기발한 창작 공간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리히텐슈타인'과 '행복한 눈물'이라는 두 단어를 치고 네이버 뉴스 검색을 해본다. 2002년까지는 단 건의 기사도 없다. 2004년까지는? 마찬가지다. 2006에는 설마? 아니다. 똑같다. 그렇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은 한국 신문과 방송에 단 한 번도 기사로서 소개된 바 없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김용철 변호사가 기자회견으로 의혹을 제기하기 직전까지 그랬다. 불과 몇 달 만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리히텐슈타인은 중유럽 초미니 국가의 이름으로 차라리 더 익숙했다. 인구 3만 여명밖에 안되는데도 월드컵에 진출해 놀랐던 기억이 난다. 명색이 예술학교에서 문화연구를 가르친다는 본인에게 작가 리히텐슈타인은 그렇게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청계천에 천공을 찌를 듯한 드릴 같은 작품이 설치된 골덴버그, 앤드 워홀과 함께 잘 팔리는 팝 아티스트로만 넘어갈 정도였다.

삼성이 비자금으로 90억대를 호가한다는 그림을 샀다고 김 변호사가 의혹 제기하면서, ‘행복한 눈물’ 또한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모든 게 변했다. 삼성 미술관(館)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술관(觀)도 싹 달라졌다. 리히텐슈타인을 최고가 작가로, 그의 ‘행복한 눈물’을 최고액 작품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황우석 사태를 통해 얼떨결에 복잡한 과학교육을 받은 우리는, 삼성 비자금 논란을 통해 팝아트에 관해서도 한 수 톡톡히 미술교육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아이들은 이제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은 몰라도,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는 확실히 분별할 수 있다. 리히텐슈타인이 만화 한 컷을 작품화 해 예술의 정의를 해체시켰다면, 삼성은 수만 점에 이르는 가히 기네스 수준의 콜렉션을 통해 자본지배시대 미술의 전혀 새로운 가치를 확인시켜 준다. ‘제의가치’와 ‘전시가치’를 넘어선 예술의 ‘축재가치’적 기능. 벤야민의 사유를 한참 초과한 슈퍼 재벌의 계산적 총명함.

인터넷으로 보고 즐기면 된다. 그게 대중사회에,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이다. 죽은 로이도 대체 그 이상 뭘 기대했겠나? 진지 버전에 대한 농담의 전복이 다름 아닌 팝아트다. 리히텐슈타인이 만화를 베끼듯 그렸다면, 우리도 그의 회화를 베끼면 된다. 요즘의 탁월한 복제기술로 컬러 프린트 하면, 그의 작품을 모두 모아도 고작 만원이 들까? 그러한 모방의 모방, 즉 끝없는 시뮬레이션으로서 '원본' 개념을 무효화시키는 게 스스로 예술의 아우라를 죽이고자 한 팝아트의 숙명이다. 인터넷을 들어가 보라. 10대들은 팝아트의 의미를 이미 오래전부터 몸으로 생생히 실천하고 있다. 리히텐슈타인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내고, ‘행복한 눈물’의 패러디를 또 다르게 패러디할 줄 안다. 그렇게 예술과 행복하게 논다. 그래서 현대미술의 참된 창작자/소비자, 유식하게 말해 ‘생비자’가 될 수 있다. 진정한 벤야민, 맥루한의 아이들이다.

그런 팝아트까지도 수십억 돈을 들여 구입ㆍ소장하는 것은, 투기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한마디로 정신 나간 짓이다. 호사가의 고상한 취미와도 무관해 보인다. 미술품 구입을 오직 축적과 유산, 과시와 선물의 수단쯤으로 생각하는 재벌적 발상 이외에 도무지 설명 불가능한 행동이다. 수입할 때 관세가 없고, 보유세도 없으며, 상속ㆍ증여할 때도 굳이 자진 신고하지 않는다면 세금을 물릴 수 없다니, 왜 재벌이 다투어 골동품ㆍ미술품 수입에 혈안이었는지 쉽게 알 만하다. 그 중에 공공의 자산이고 국가의 보물이어야 할 것들은 혹 없을까? ‘행복한 눈물’을 재벌과 재벌 미술관, 재벌 문화재단, ‘홍 여사’가 홀로 소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더 이상 팝아트, 즉 대중의/대중적 예술로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직 상품의 용도로만 독점 비축하겠다는 반미학적 발상에 다름 아니다. 어찌 이를 후기자본주의 팝아트의 ‘서글픈 눈물’이라고 이름 붙이지 못하겠나.

‘행복한 눈물들’은 말했듯이 이미 모방의 모방의 모방이 자유로워진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대중적 공간에 무수하게 존재한다. 지금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가짜 오리지널 ‘행복한 눈물’은 작품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잃은 상태에서 오직 상품 축적가치로서만 취급될 것이다. 불행한 미술, 예술의 죽음을 이렇게 방관하는 것은 폭력이다. 국립미술관에 버금가는 작품을 일개 재벌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큼 한국사회의 천민자본주의적 속성을 반증하는 것도 없다. 미국의 어느 초국적 기업이 삼성처럼 예술품을 속물적, 물신적으로 수집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바 없다. 1만 5천 점이 넘는다는 세계 10대 삼성 콜렉션은 더 이상 미술관, 미술전이 아니다. 1조인지, 그 이상일지 모르는 돈의 금고다. 문화재단(文化財團), 다시 따져보니 참 그 말뜻이 의미심장하다. 이 같은 사실 자체가 죽은 미술, 야수적 예술의 비극적 패러디가 된다.

미술의 비참, 예술의 죽음에 침묵하는 예술가, 비평가는 그 이름을 버려야 한다. 실종된 미술, 은폐된 예술을 찾아 나서지 않는 신문, 방송도 사태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특검에게 미루고, 제보자에게 의존하는 리포트로 통할 거짓 ‘공화국’이 아니다. 진실을 끈질기게 심문하는 저널리즘만이 ‘행복한 눈물’을 불행한 폐쇄 장소로부터 유쾌한 감동 공간으로 구원할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서미 갤러리 대표가 해외에서 구입해 자신이 직접 갖고 있다던 지금까지의 말을 바꾸었다고 한다. 자신이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소환될 관장은 또 어떻게 진술할지 궁금하다. 스프링 달린 무진동차, 국제 화상, 환상의 놀이공원 에버랜드 속 베일의 건물, 수장고 속의 비밀 수장고, 재벌 귀부인. ‘화려한 눈물’의 실종만큼 당차게 취재에 나서볼 유혹적인 사건, 중대한 사고가 있겠는가? 생각을 접고 인터넷으로 다시 들어가 오리지널의 모방의 복제의 진품을 잠깐 ‘즐감’해 본다.

지금처럼 ‘비평의 무기’를 예리하게 연마하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할 때가 있을까? 벼락같은 이성의 도끼질, 결을 거스른 감수성의 대패질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래디컬’한 저널리스트로의 변신. 자본권력과 국가권력, 매체권력, 지식권력이 나의 상대다. 가끔 참패당하고 때로는 붙잡고 버티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왼손펀치 한방을 가진 선수로 남고 싶다. 인민은 착하고 또 무섭다. 이들과 함께하는 비평 말고 그 어떤 것이 후기근대, 후기자본의 불모지대를 넘어갈 수 있겠나? 목청 낮춘 채 예의주시하는 보통사람들의 삶, 이들의 언어에 스며들어 비평의 유격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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