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국의 재즈 1세대 공연 <브라보! 재즈 라이프>가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고 쎄시봉 역시 열풍 수준이다. 갑자기 찾아온 베테랑의 귀환, 베테랑의 봄이다. 외환위기 이후 명퇴가 상시화된 사회를 거스르는/불편해하는 문화적 결/욕망으로 읽고 싶다.”
경험이란 말이 “경험치”로 수치화되며 가상 세계의 게임 용어가 될수록, 실제 세계의 경험은 세월의 깊이가 아닌, 넓으나 얇디얇은 스펙이 되었다. 그나마 쎄시봉 4인방은 연주하고 노래하는 숙련 노동자이기에 경험의 깊이를 드러낼 수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주와 노래가 공산품이 되어버린 실제 세계에서 숙련 노동자의 귀환은 신선했다. 시청자가 받은 감동의 출처를 구시대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무자비한 속도에 대한 저항으로 읽고 싶었다. 상품 교환의 속도로부터 명퇴당한 인간의 속도에 대한 재발견 말이다. 경험이 쌓여 관록이 되고, 관록이 인격이 되는 속도는 삶의 속도와 일치한다. 반면 상품 세계의 속도는 경험을 박피하여 박리다매한다. 삶의 속도를 어그러뜨려 사람을 돈의 수단으로 삼는다. <전태일 평전>에서 조영래 씨가 쓴 표현을 빌자면 “인간 비료화”다.
나의 멘션에 이어진 그녀의 멘션에서 충격을 받았다. 쎄시봉에서 느꼈던 낭만적 감성이 빠르게 식어갔다. “노래에도 계급이 있다”는 그녀의 일갈 앞에서 잠시 멈추어서 성찰했다. 70년대 대학문화, 청년문화가 실은 한 줌의 유한계급의 문화였으며, 쎄시봉은 그 한 줌의 문화를 마치 전체 세대의 문화인 양 호도하는 것은 아닌가란 생각을 해 보았다. 쎄시봉에 대한 김진숙 씨의 냉소는 동일한 70년대를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지금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노동자 계급의 현실을 일깨웠다. 쎄시봉이라는 당의정에 가려진 쓰디쓴 진실의 한 조각은 70년대가 그리 말랑한 시대가 아니었으며, 그들이 귀환한 오늘 이 순간도 달콤한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허나, 이러한 김진숙 씨의 날카로운 현실 인식에 더해 “노래에는 계급도 있다”란 말을 덧붙이고 싶다. 간판장이였던 나의 노동자 아버지는 송창식의 팬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집에는 송창식의 레코드판과 카세트테이프가 있었다. 총각시절 아버지의 빛바랜 흑백 사진을 보면 청바지와 통기타가 등장한다. 물론 쎄시봉의 음악에는 노동자가 없다. 그러나 쎄시봉에 환호하는 이들 속에 노동자가 있다. 최종학력 국졸의 아버지가 가졌을 청년문화, 대학문화에 대한 동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잠시나마 쎄시봉을 듣거나 쎄시봉의 노래를 부르며 대학생이 되어버린 듯한 해방의 순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 해방의 순간은 단지 현실도피만이 아니다. 해방의 체험은 해방의 꿈을 낳는다. 해방의 꿈은 현실을 변형하는 자양분이 된다.
아버지가 쎄시봉을 듣거나 그들의 노래를 부를 때의 체험이 남을 착취하는 자본가가 되려는 욕망은 아니었을 게다. 노동하면서도 즐거울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꿈, 모두가 흥에 겨워 신명나는 사회에 대한 꿈, 제 자식은 대학생이 되어 저들처럼 멋졌으면 좋겠다는 꿈이었을는지 모른다. 그러한 신명이 노래로 구전되고, 자식에게 전수되며, 오늘의 우리 가정을 일구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본질적으로 노동자의 노래, 본질적으로 자본가의 노래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 속에서 노동자의 꿈을 발굴하는 작업이고 그 꿈을 현실화하는 작업이다. 이번 설 연휴의 쎄시봉 특집에서 베테랑의 귀환, 베테랑의 봄에 주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의 노래는 여전히 감미롭고 편안하며 세상의 변화와 무관하게 남아있지만, 이 시점에서 그들의 음악은 어쩌면 명퇴되지 않고 살아남은 숙련노동자들이 갖는 지적, 경험적 가치의 소중함일 수 있다. 쎄시봉의 즐거움을 죄스러운 쾌락으로 버리는 게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바꿀 수 있도록 잠재태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보다 생산적일 것이다.
글을 쓰던 도중 김진숙 씨가 며칠 전부터 식음을 전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활기차게 투쟁 소식을 전하던 그녀의 트위터도 멈추었다. 한진중공업이 정리해고를 곧 단행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상황은 급변했다. 어제부터 농성장에 전기도 끊기고 노사 간의 물리적 충돌도 빈번하다고 한다. 다시금 상품의 속도가 사람의 속도를 압도할 기세다. 해고는 살인임을 우리는 쌍용자동차 사태로부터 뼈아프게 확인했고, 어쩌면 그와 같은 비극을 다시금 반복할는지도 모른다.
이 와중에 쎄시봉에 주목하는 진지전은 어쩌면 한진중공업의 속도전에 무력해 보일 수도 있겠다. 쎄시봉에 열광하는 우리들의 감미로움과 편안함에 김진숙 씨가 또 다른 서러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 허나, 진지전 없는 기동전 없고, 기동전 없는 진지전 없다. 불과 며칠 전 쎄시봉에 열광했던 우리네 감수성이 한진중공업의 현장과 본질적으로 분리 가능한 것은 아니다. 기실 정리해고 대상자 하나하나가 모두 쎄시봉이다. 긴 세월 부산 영도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경험이 쌓여 관록이 되고, 관록이 인격이 되어버린 쎄시봉들. 이들을 한 순간 내쳐 자본의 비료로 삼을 상품의 논리를 꺾어내는 것은 인간성의 회복이자 사람의 구원, 삶의 회복이다. 쎄시봉에서 느꼈던 감동은 그리하여 한진중공업의 투쟁의 현장뿐만이 아니라 비인간이 되길 강요받는 이 땅의 모든 삶 속으로 접속한다. 우선은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부터 관심을 기울이자. 그리고 이 땅의 모든 비인간적 대우를 강요받는 소수자에게로도 관심을 확장하자. 비장하지 않게, 그러나 가볍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