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마 톤즈 - 사람이 아니었던 사람

본다, 본다 하면서도 계속 미뤄둬서 아쉬웠던 참에 마침 티비에서 방송을 해줬습니다. "오호라, 이런 횡재가 다 있나!"라면서 봤는데... 주변에 보신 분들이 많으셔서 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보는 내내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질 않더군요.

"도대체 저분은 문명의 이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어떻게 버티신 걸까?"

저 같은 범인은 죽는 날까지 이해할 수 없겠죠? 몇 년 전부터 아프리카에 자원봉사를 가고 싶어 했으면서도 여태 못 간 이유 중에 하나가 체류기간 때문입니다. 단체마다 다르지만 제가 희망하는 곳은 보통 3~6개월을 머물러야 해서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아무리 즐거운 여행도 3개월은커녕 1개월 이상만 되더라도 지칩니다. 그런데 자원봉사를, 그것도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문명과의 접촉을 최소화한 채로 3~6개월을 버틴다? 이건 어지간한 봉사정신으로는 감히 시도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낙후된 시설이나 힘든 일에 대해선 각오가 되어 있지만 말이죠...

이태석 신부님은 의사라는 사회적 신분의 우위를 점하셨으면서도 홀로 수단에 가셨으니, '成人'이 아니라 '聖人'으로 불리셔야 마땅합니다. 제게 종교란 인간의 나약함이 만들어낸 허상이자 광기에 불과합니다만, 수단 사람들의 말마따나 예수의 현실적인 재림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아니, 성경에만 있는 예수보다 훨씬 숭고하고 고결합니다.

다큐멘터리 자체의 만듦새는 그다지 맘에 들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색채가 짙어서 거부감도 생기고, 내레이션의 잦은 간섭은 보는 내내 거슬렸습니다. 카메라 또한 피사체에게 지나치게 접근하며 관객의 심리를 자극하려는 의도가 엿보였고...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태석 신부님의 존재만으로도 볼만한 가치는 있었기에 별점을 생략하기로 했습니다.


불신지옥 - 한국공포영화여, 이대로만 가다오 ★★★★

북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개봉해서 보지 못했던 작품입니다. 극장에서 한번 놓치면 좀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어서 이제야 봤네요. 한참 늦긴 했지만 듣던 대로 과연 아주 맘에 들었습니다. 제가 공포영화에는 굉장히 인색한 편인데 별 4개를 줬으니 여타 장르의 영화에 5개를 준 것과 거의 맞먹는 걸로 봐도 좋습니다.

국적을 불문하고 공포영화는 으레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데만 급급합니다. 괜스레 관객을 놀래키려고 한다거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사운드를 삽입한다거나. 그런 쪽으로만 집중해서 알맹이는 부실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만 보완하면 훌륭한 공포영화가 꽤 많을 텐데, <불신지옥>이 그렇습니다. 앞서 "종교는 인간의 나약함이 만든 허상이자 광기일 뿐"이라고 했죠? 이 말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영화가 <불신지옥>입니다. 단적인 예로 류승룡이 연기한 형사를 보세요. 처음엔 콧방귀도 안 뀌던 사람이 딸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비웃던 이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전락했습니다.

<불신지옥>은 연출도 좋지만 무속신앙과 기독교를 한데 묶은 시나리오가 탁월합니다. 상상 이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종교적 갈등을 다른 방향으로 능숙하게 풀어냈습니다. 제가 본 한국공포영화 중에서는 <기담>과 함께 가장 맘에 듭니다.


페르마의 밀실 - 머리가 텅 빈 미녀 ★★☆

'무한도전' 재방송을 보다가 알게 된 영화입니다. 트레일러에 멤버들을 가둬놓고 수수께끼를 맞히게 하는 에피소드였는데, 문제의 출처로 이 영화를 언급하더군요. 나름 흥미가 생겨서 봤는데... 이건 아주 제대로 공갈빵!

길게 말할 것도 없이 <페르마의 밀실>은 허점투성이입니다. 발상은 좋았지만, 그 발상을 제대로 전개할 수 있는 이야기로서의 아이디어는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수수께끼란 소재로 인해 겉으론 꽤 그럴 듯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도저히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노골적으로 말해 수수께끼만 빼면 이 영화는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전무한 수준입니다. 차라리 <큐브>처럼 구성원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 따위라도 생략하던가... 중반부터 결말까지 허망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우 투 비 - 방황하는 청춘처럼 방황하는 영화 ★★★

재생 버튼을 누르고 잠시 후,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영화를 보려는 거지? 난 로버트 패틴슨의 팬도 아니고, 딱히 관심이 있던 영화도 아닌데 왜 이걸 보고 있는 거지?" 거참 희한한 일입니다만 어쨌든 보긴 봤습니다.

<하우 투 비>는 이를테면 대니 보일의 초기작 <트레인스포팅>처럼 방황하는 영국의 청춘들을 그린 영화입니다. 주인공 아트는 20대 중반임에도 뭐 하나 제대로 하는 일도 없이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부모는 일찌감치 부모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고, 친구들이라고 해봐야 자기랑 별 다르지 않은 군상입니다. 심지어 여자친구에게도 버림받아 그가 기댈 곳이라곤 어디에도 없습니다. 급기야 자기계발서의 저자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 집으로 초빙하기게 이르는데...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비해 사실 영화는 굉장히 투박하고 난잡합니다. 영화 속의 인물들처럼 정돈이 되지 않아 의도적인 연출인가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입니다. 그래도 로버트 패틴슨이 이런 찌질한 연기를 곧잘 하는 걸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합니다. 아울러 결말의 희망적인 메시지가 조금은 맘에 들었습니다만... 추천하고 싶진 않아요.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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