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들갑부터 좀 떨어볼까요? <윈터스 본>에 이어 <아이 엠 러브>까지, 올해는 연초부터 명작을 만나는 기쁨이 이어지는군요. 두 편 모두 만점을 줬지만 심리적인 파급력에 있어서는 <아이 엠 러브>가 한 수 위였습니다. 긴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이 영화가 끝났을 때는 저도 모르게 "브라보!"라고 외치며 박수를 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현빈의 유명한 대사를 잠시 인용하고 싶어졌습니다. "이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영화가 아니야. 이탈리아의 장인과 명배우가 모여서 한 컷 한 컷 완벽을 기하면서 만든 걸작이라고!"

이 말 그대로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도나텔로, 라파엘로 등의 손을 거친 르네상스 시대의 고귀한 걸작 예술품을 연상시키는 <아이 엠 러브>는, 적어도 제 짧은 식견에 비춰보자면 거의 완벽의 경지에 다다른 영화입니다. 장면 하나하나가 버릴 것이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행여 놓치는 장면이 있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관람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전 이 영화를 두 번 관람하게 됐고, 불가항력에 이끌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아이 엠 러브>를 봤을 때는 영화가 끝나자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혔습니다. 이건 차라리 섹스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의 경지인 오르가즘에 비유하고도 전혀 모자라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감흥을 달래기엔 부족합니다. 기회를 틈 타 한 번 더 관람하고 싶고 디비디로 나오면 반드시 소장할 영화입니다. 시나리오와 연출, 음악, 촬영, 연기까지 이 영화의 모든 것은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정녕코 <아이 엠 러브>는 근래 보기 드문 걸작입니다. 오랜만에 본 이탈리아 영화지만 제게 있어서는 이탈리아 영화계의 르네상스를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 같습니다.

자, 여기까지 읽으신 것으로 이제 충분합니다. 제 선구안을 믿으시는 분들이라면 당장 가까운 상영관으로 달려가세요. 이 문단 이후로는 할 수 있는 한, 모조리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데 주력할 것입니다. 고로 스포일러가 존재하겠지만, 그쯤은 다 알고 보셔도 전혀 무방합니다. 전 오히려 두 번째로 관람할 때 더 감격스러웠으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만약 보시고 맘에 안 드신다면 제게 돌을 던지세요. 기꺼이 태연자약하게 맞아 드리겠습니다. 지금 전 <아이 엠 러브>를 가지고 내로라하는 전문가와 마주앉아 열띤 대화를 하면서 한 수 배우고 싶은 심정이 간절합니다.

하...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관람을 하고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흥분이 가시질 않습니다. 아니, 이 흥분이 가시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껏 수도 없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 환희에 사로잡힌 것은 참 오랜만입니다. 숫제 '스탕달 신드롬'에 빠진 사람마냥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으며 정신은 분열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거듭 이런 표현을 일삼아서 송구스럽지만, 정말 지상 최고의 섹스를 맛본 기분입니다. 달리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쾌감을 전달할 수 있는 마땅한 표현수단이 없군요!

레키 가문의 엠마

그냥 떠오르는 대로 열거를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이 엠 러브>는 눈으로 뒤덮인 겨울의 밀라노를 비추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고향 러시아에서 남편을 만난 엠마는 이 화려한 패션의 도시로 건너와 재벌가의 며느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지금의 레키 가문을 일군 장본인이자 엠마의 시아버지 생일을 맞아 온 가족이 한데 모입니다. 엠마는 집안의 거사를 치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식탁에서의 자리배치까지 챙길 정도로 꼼꼼하고 섬세하며 배려심이 깊은 여자입니다. 아들 에두아르도가 출전한 경기에서 비록 2위에 그치긴 했으나 다들 즐거운 얼굴로 마주하며 식탁에 앉습니다.

얼핏 화목하고 단란한 가족공동체로 보이지만 이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릅니다. 그리고 이 묘한 긴장감은 엠마의 시아버지가 자신의 후계자로 탄크레디와 에두아르도를 공동으로 지목하자 서서히 외부로 표출되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은 각각 엠마의 남편과 아들입니다) 쭉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삶을 살아온 탄크레디로서는 그렇지 않은 아들과 함께 회사를 경영하게 됨에 불만을 가질 만도 하지요. <아이 엠 러브>는 일찌감치 이러한 레키 가문의 균열과 불협화음의 전주를 들려주고 있는데, 이에는 촬영과 미술의 공 - 정확히 말해 공간 활용 -이 상당히 큽니다.


공간활용의 극치를 보여주는 촬영

엠마의 집은 재벌가에 걸맞은 으리으리한 대저택입니다. 정문에서 현관까지 대략 50미터쯤 되려나요? 집보다는 궁궐에 가까울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해 다섯 명의 가족이 살기에는 차고 넘칩니다. 하인도 여럿 거느리고 있으니, 대저택 자체가 사치와 허영심 그리고 특권의식으로 가득한 부르주아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죠. 사람의 체온으로는 도저히 감쌀 수 없는 이 공간에는 일체의 불균형도 허용하지 않을 듯한 냉기만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철두철미한 계획하에서 가문의 이름으로 요구받은 삶을 살며 인간미와 점점 멀어집니다. 엠마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재미있게도 <아이 엠 러브>는 대저택이라고 하면 으레 떠오르는 커다란 방을 비추지 않습니다. 제 기억에 따르면 풀샷으로 방의 전경을 담았던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래서 또 한번 더 관람하고 싶어집니다) 대신에 온통 벽과 문으로 가로막힌 공간을 탐닉합니다. 그처럼 어마어마한 규모의 집임에도 곳곳이 미닫이 또는 여닫이 문과 벽으로 죄다 분할되어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벽난로도 미닫이문으로 막혀 있고 창문에는 커튼마저 드리워져 있습니다. <아이 엠 러브>의 이러한 공간은 곧 레키 가문의 일원들에게 존재하는 심리적인 장벽과 그들의 - 특히 엠마의 - 격리된 삶을 상징합니다.

절로 폐소공포증이 떠오르게 만드는 갑갑한 무대에서 재기 넘치는 촬영은 불을 뿜습니다. 특히나 공간의 활용에 있어서는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좁은 만큼 카메라의 이동과 조명 설치 등에 애를 먹었을 법도 한데 한 치의 막힘도 없이 유연하게 흘러갑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것이 단순히 테크닉의 우월함을 자랑하는 얄팍한 수단이 아니란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랬다면 <아이 엠 러브>는 영화 속의 부르주아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자아도취에 빠진 졸작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 이것을 훌륭한 도구로 사용했기에 이토록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관찰자의 시선

<아이 엠 러브>는 종종 벽으로 가로막힌 관객의 시야 저편에 인물을 머물게 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그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물론 보이는 것은 벽이고 들리는 것은 그 뒤에서 나누는 대화나 작은 소리에 불과하지만, 그럼으로 인해 관객을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합니다. 불필요한 컷의 분할을 최소화하려 애쓰면서 카메라가 피사체를 향해 움직이는 것 또한 관객을 관찰자의 시점과 동일시하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영화를 봄에 있어 다분히 '관음증'의 욕구를 가지는 관객의 불편함을 가중시킬 수 있다 하여 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홍상수 감독도 비슷한 스타일을 고수합니다)

이를 통해 감독은 어쩌면 고향을 떠나 레키 가문으로 시집을 왔던 당시에, 더 나아가 현재까지도 달라지지 않은 엠마의 심정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벽 뒤에서 서성이는 듯한 관객처럼, 엠마도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쉽사리 가문의 일원으로 끼어들 수 없어 애를 먹었겠죠. 그리고 여전히 가문의 암묵적인 규약에 구속된 채로 억압받고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화를 보며 관객이 느끼는 답답함이나 고독은 결국 엠마가 느꼈을 그것과 동일합니다. 컷을 전환하고 벽 뒤에 있던 인물들에게 조심스레 카메라가 다가가는 것도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적막한 공간만큼 <아이 엠 러브>의 카메라가 자주 담는 것이 거울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엠마와 탄크레디 등의 인물을 거울 앞에 수시로 세워두는데, 이것은 자신의 내면은 보지 못하고 자아를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자들의 애처로운 처지를 반영한 샷입니다. 나중에 엠마가 말하길 그녀는 남편을 따라 밀라노로 오면서 러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려야만 했다고 합니다. 세 명의 자녀를 낳고 사는 동안에도 늘 자신이 누군지 잊고 살았는데, '안토니오'를 만나면서 잠자던 자아를 일깨웁니다. 그리하여 결말부에 이르면 거울 속에 비춰지는 자는 초반부와 달리 탄크레디 혼자입니다.


엠마를 찾아서

영화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엠마는 억압된 삶을 살았을지언정 언제나 기품 있고 우아하며 자상한 아내이자 어머니였습니다. 그렇게 엠마는 세월의 흐름을 따라 어느덧 자아를 의식할 틈조차 없이 까맣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아마도 고향을 한번도 방문하지 못한 그녀에게는 이것이 시름을 덜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그런 그녀가 우연히 딸이 레즈비언임을 알고 충격에 빠집니다만,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엠마로 하여금 본연의 자아를 갈망하게끔 하는 도화선을 만들어줍니다. 자신은 감히 도전하지 못한 패러다임을 무너뜨리는 용기를 가진 딸이 역으로 동경의 대상이 된 셈입니다.

딸이 만들어준 도화선에 불을 붙인 사람은 에두아르도의 친구 안토니오입니다. 두 번의 우연한 만남 이후에 엠마는 안토니오가 요리사로 있는 레스토랑을 방문합니다. 이곳에서 그의 섬세하고 감성적인 손으로 빚은 음식을 맛보며 그녀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어떤 희열과 조우하게 됩니다. 이렇듯 <아이 엠 러브>에서 음식은 엠마가 지니고 있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상실한 자아를 일깨우는 촉매제의 역할을 합니다. 급기야 안토니오에게 매료된 엠마는 그가 에두아르도와 함께 레스토랑을 개업하려는 도시 '산레모'를 찾아갑니다. 하필 그 도시가 산레모라니, 이것도 참 기막힌 설정입니다.

알프레도 노벨이 머물렀던 이탈리아 남부의 휴양도시로 유명한 산레모(Sanremo)에는, 영화에서 보이다시피, 러시아 정교회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의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여왕은 휴가를 보내면서 이 도시에 반해 해안가에 야자수를 심어줬습니다. (엠마가 이 거리를 걷는 장면도 영화에 나옵니다) 이로 미루어 판단해보자면, 엠마가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기에 이만큼 잘 어울리는 도시도 없습니다. 종국에는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 후에 그녀는 안토니오와 시간을 보내면서 오랜만에 자신의 본명을 떠올렸고, 안토니오도 그 이름을 불러줍니다.


SEX in the Nature

<아이 엠 러브>의 배경지로 등장하는 산레모와 밀라노, 런던은 각각 다른 이미지로 보여집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밀라노와 산레모의 대비가 돋보입니다. (런던은 조금 정치적인 이미지가 깔립니다) 전자에 속한 엠마가 타자와 다름없는 존재로 살아왔다면, 후자에서의 그녀는 녹음이 울창한 자연의 생명력을 보며 본연의 자아를 갈구합니다. 때문에 안토니오와 엠마의 정사는 쾌락을 추구하는 육체적인 행위를 벗어나 서로의 진실한 내면을 욕망하는 숭고한 몸짓으로 승화합니다. <아이 엠 러브>는 영화 전체를 한번의 격정적인 섹스로 비유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후에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최초로 안토니오와 섹스를 나눈 엠마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화장실로 달려갑니다. 이어서 방광이 터지기 일보직전까지 참았다는 듯 시원하게 소변을 보면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천천히 줌인하는 카메라는 이내 더없이 환한 미소가 번진 엠마의 얼굴이 비친 거울을 잡습니다. 심지어 몹시도 들떠있는 듯한 표정입니다. 전 이 장면을 보면서 흠칫 놀랐습니다. 당연히(?) 아들의 친구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데 대한 죄책감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담긴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요!? 오히려 감독은 정반대로 기존의 일반적인 잣대를 뒤엎으며 진정한 행복을 논합니다.

이 장면은 '카타르시스'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카타르시스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종교적으로는 정화를, 의학적으로는 배설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소변을 보는 엠마는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륜을 저질렀다는 기준에서는 정화의 역할을 하지만 엠마의 억압된 삶을 헤아리자면 배설로 해석할 수 있겠죠. 아무래도 환하게 웃고 있는 엠마를 보면 그간 참아왔던 억눌린 정서의 배출을 은유적, 물리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기도 한데, 두 사람의 첫 섹스장면을 생략한 것도 탁월한 선택입니다.

정확히 어떤 의도가 담긴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덕분에 시각적인 자극에 흐트러질 수도 있었던 관객의 집중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자칫하면 이어지는 장면, 그러니까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엠마가 내포한 진의를 퇴색하게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한편 정신분석학에서는 카타르시스를 장애의 요인이 되는 컴플렉스 따위를 해소하는 치료요법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역시 엠마의 케이스에 대입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결국 불륜이라는 비극이 역으로 치료제로 작용하면서 엠마의 억압된 심리를 해방시켜주는 것으로 도출된 셈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카타르시스의 정의로 내세운 매개체는 예술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아이 엠 러브>에서는 그 역할을 안토니오와의 섹스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그래서 <아이 엠 러브>의 섹스씬은 참으로 숭고하고 고결한 인간의 본능으로 그려집니다.


안토니오

엠마가 안토니오에게 이끌린 이유는 단순명쾌합니다. 안토니오는 요리사가 되려고 하지만 돈 밖에 모르는 아버지가 금세 망하고 말 거라며 극구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두 사람의 관계에는 일종의 동질감이 부여됩니다. 그러나 안토니오의 재능을 알아본 에두아르도가 기꺼이 도와주게 되면서 그는 벽을 허물고 자신의 꿈을 펼쳐 나가며 엠마에게 동경의 대상으로 변합니다. 엠마의 딸 베타가 레즈비언임을 밝히면서 동일한 존재로 다가섰듯이 말입니다. 단순히 불륜으로 치부하고 손가락질만 할 것이 아니라, 어쩌면 안토니오는 엠마로 하여금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고자 하는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그녀의 아들인 에두아르도로에게 진 빚을 갚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두아르도

<아이 엠 러브>에서 유일하게 비극으로 생을 마감하는 인물입니다. 도입부에서 에두아르도가 경기를 2등으로 마쳤다는 것에서 그의 운명에 대한 복선이 깔리기는 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에두아르도의 캐릭터는 일면 정치적인 의미가 서려있기도 합니다. 그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됐습니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레키 가문의 유산인 명성과 가치, 전통 등을 지키려고 하죠. 반면에 아버지인 탄크레디와 남동생은 그릇된 진보주의자로 나섭니다. 이들은 에두아르도의 의지에 반하여 시대의 조류에 부응한다는 기치하에 회사를 팔아넘기려고 합니다.

끝내 에두아르도는 아버지의 뜻을 꺾지 못하고 변화와 개혁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레키 가문은 회사를 매각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냉정한 자본주의사회의 논리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잘은 모르지만 이는 어쩌면 이탈리아의 정치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로 인해 에두아르도는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는데, 급기야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어머니의 배신까지 맞물리면서 그의 운명은 죽음으로써 귀결됩니다. (에두아르도가 그렇게 지키고 싶어 했던 지금의 레키 가문이 실은 2차 세계대전 때 유태인을 착취한 결과물이란 것은 참 비극적인 아이러니입니다)

언뜻 보면 엠마의 불륜이 에두아르도의 죽음에 큰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전에 이미 에두아르도의 영혼은 아버지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습니다. 다만 아들의 눈에 다른 이들과 똑같이 위선과 가식으로 점철된 사람으로 비춰진 것은 엠마에게 씻을 수 없는 죄의식으로 남습니다. 안토니오에게 말했듯이, 에두아르도는 엠마가 본디 지녔던 정체성을 좋아해준 단 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에두아르도가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 채고 밖으로 나가며 러시아어로 "고맙습니다(Спасибо, 쓰빠시바)"라고 한 것도 그래서 커다란 울림을 전합니다.


면죄부

<아이 엠 러브>는 잊고 살았던 자아를 찾아가는 엠마의 여정입니다. 영화 속에서 이것을 상징하는 코드가 여러 번 보이는데, 후반부에 이르면 그것이 회심의 일격으로 등장합니다. 엠마는 에두아르도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그의 방에 쓰러져 잠이 듭니다. 이때 어둠으로 뒤덮인 에두아르도의 방은 어머니의 자궁이 되고, 엠마는 이곳에서 짧은 꿈을 꾸며 다시 태어납니다. 곧이어 장례식에서 아들을 잃었다는 슬픔과 자신이 원인을 제공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못한 엠마는, 마침내 성당에 갇힌 비둘기를 보면서 남편에게 고해성사를 합니다. 안토니오를 사랑한다고...

이 말을 들은 탄크레디는 격한 분노와 욕설을 토해내지 않고 단 한 마디만 하고 사라집니다. 에두아르도도 죽기 직전에 비슷한 말을 했는데, 두 사람은 공히 엠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립니다. 차라리 욕설이 낫지 이보다 더한 수모가 있을까요? 하지만 이것이 엠마에게는 도리어 면죄부이자 허가증으로 주어집니다. 에두아르도의 발언은 레키 가문과의 연결고리를 끊을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되고, 탄크레디는 처음부터 엠마를 없었던 사람으로 간주하면서 그녀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비로소 엠마는 참아왔던 욕망을 궁극적으로 폭발시키려는 결심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영광의 탈출 그리고 오르가즘

자, 마침내 여기까지 왔네요. 남편으로부터 면죄부이자 허가증을 받은 엠마는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옵니다. 슬픔에 잠긴 채로 거실에 모인 사람들은 보지도 않고 재빨리 그들을 지나쳐 뛰어가는 엠마. 그녀는 방을 찾기가 무섭게 자신이 걸치고 있던 옷과 장신구를 모조리 벗어던지고 가벼운 운동복을 입습니다. 이윽고 베타와 잠시 마주한 상태에서 두 사람은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짜잔! 엠마는 레키 가문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것이 바로 <아이 엠 러브>를 한번의 환상적인 섹스와 결부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대목, 마지막 3~4분입니다.

글재주가 없어서 묘사가 한참 부족하지만 이 짧은 시퀀스에 담긴 폭발력은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아마 직접 보신다면 제가 왜 오르가즘 운운한 것인지 백분 이해하실 겁니다. 이건 남녀가 한데 뒤엉켜 격렬한 육체적 운동 끝에 맛보는 짜릿한 그것과 비견되기에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을 저로서는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영화를 통해 엠마의 현실을 목도한 관객이라면 응당 누구라도 저와 동일한 감정적 흥분을 느끼셨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아이 엠 러브>의 모든 것은 이 시퀀스를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편집과 촬영, 음악 등을 아우르는 감독의 연출력에 존경을 표해 마땅할 정도의 응집력을 선사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결말입니다. 아울러 <아이 엠 러브>의 풍부한 음악은 인물의 심리를 적극 반영하여 때로는 서정적으로, 때로는 재치를 담으면서 극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흡사 무성영화의 그것을 연상시키기도 했는데, 여기선 또 다시 변화를 시도하며 격정적인 연주를 들려줬습니다. 이러한 연주가 더해진 것이야말로 영화의 완성이요, 음악이 영화에 미치는 절대적인 영향력의 표본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틸다 스윈튼을 떠올리면 온 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입니다. 줄곧 강한 인상의 이미지로 기억되던 그녀가 <아이 엠 러브>에서는 원숙미가 물씬 배어 나오는 훌륭한 연기를 보여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시퀀스에서는 각각 하녀와 베타로 등장한 두 여배우가 틸다 스윈튼과 함께 완벽한 연기의 앙상블을 보여줬습니다. 엠마와 진한 포옹을 나누고는 울음을 터뜨린 하녀, 벽을 경계로 말없이 시선을 나누던 베타의 표정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두 사람 다 엠마의 심정을 이해했기에 영광의 탈출을 축복했으리라고 믿습니다.


I AM LOVE

영제인 <I AM LOVE>는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톰 행크스가 말했던 대사입니다. 엠마가 침대에서 이 영화를 보던 장면이 나오기도 했는데, <필라델피아>가 어떤 영화인지는 대충 아시죠? 여전히 정확한 어원(?)은 모르겠으나, 엠마는 톰 행크스가 덴젤 워싱턴과 대화를 나누다 말고 오페라를 듣던 장면을 봅니다. 이 오페라는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움베르토 죠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르, Andrea Chenier> 중에서도, 그 유명한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La Mamma Morta>입니다. (참고로 작년에 개봉했던 <하녀>에도 이 곡이 삽입됐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이 곡에 심취한 톰 행크스가 가사의 일부를 덴젤 워싱턴에게 전하는데, 그가 말한 마지막 가사가 바로 "I am love"입니다. 이 제목과 영화의 내용은 <필라델피아>는 물론이거니와 <안드레아 셰니에르>와도 연계할 수 있겠지만 생략하겠습니다. 각설하고, <I am love>는 "나는 사랑이다"보다는 "나는 사랑으로 인해 존재한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알맞을 듯합니다. 엠마가 안토니오와의 만남을 통해 잊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고, 사랑은 죽어 있던 엠마의 영혼에 생명력을 전달하며 해방으로 인도했다는 것을 보자면 말입니다.

엔딩 크레딧에 추가로 삽입된 장면에서는 동굴 속의 엠마와 안토니오를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어쨌든 일반적인 판단기준에 따르면 어디까지나 불륜이며 신분과 나이차마저 초월한 것입니다. 속세에서는 쉽사리 허용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엠마와 안토니오는 사랑 이외의 그 어떤 욕망이나 간섭도 존재하지 않는 태고의 자연으로 가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사랑으로 존재하며, 사랑이 있기에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불륜이라면 무조건 경멸의 대상으로 삼는 저지만, 이들에게는 도저히 돌을 던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