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프로야구 원년은 만루 홈런으로 시작해 만루 홈런을 거쳐 만루 홈런으로 끝났습니다. 1982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현재 철거된 동대문야구장)에서 거행된 원년 개막전에서 MBC 청룡은 이종도의 10회말 2사 후 끝내기 만루 홈런으로 삼성에 11:7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해 7월 초 부산, 광주, 서울을 돌며 세 경기로 치러진 첫 올스타전에서는 3차전 7회말 롯데 김용희가 청룡 유종겸을 상대로 만루 홈런을 터뜨리며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되었습니다. 원년을 마무리하는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는 김유동이 9회초 뿜어낸 만루 홈런에 힘입어 OB가 삼성을 누르며 프로야구 첫 패자에 올라섰고 김유동은 시리즈 MVP로 선정되었습니다.

이종도의 개막전 만루 홈런과 김유동의 한국시리즈 6차전 만루 홈런을 허용한 것은 공교롭게도 삼성 이선희였고 그 때문에 ‘비운의 투수’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선명하게 각인된 것은 롯데 김용희 올스타전 만루 홈런과 OB 김유동의 한국시리즈 6차전 만루 홈런의 타구의 아름다운 궤적이었습니다. 두 홈런은 높이 솟아올라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좌측 담장을 훌쩍 넘어갔습니다.

1980년대 프로야구의 홈런은 이처럼 포물선의 궤적을 그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웨이트 트레이닝이 체계적으로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타고난 힘을 자랑하는 거포가 아닌 이상 홈런을 터뜨리는 선수도 많지 않았습니다. 홈런이 귀했던 만큼 당시의 팬들은 홈런포가 터질 때마다 크게 열광했습니다.

1986년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한 장종훈은 홈런의 지평을 바꿨습니다. 연습생(신고 선수)으로 입단한 뒤 피나는 노력 끝에 1군 무대에 오른 장종훈은 힘뿐만 아니라 뛰어난 타격 기술로 빨랫줄처럼 힘 있게 쭉 뻗어나가는 직선 홈런을 펑펑 터뜨린 것입니다. 당시 우타자라면 잡아당기는 타격으로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이 일반적이었지만 장종훈은 가장 넓은 잠실야구장의 가운데 담장을 넘겨 백스크린을 강타하는 대형 직선 홈런을 터뜨려 빙그레의 팬들은 물론, 상대인 LG 응원석의 관중들조차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습니다. 장종훈이 휘두른 방망이에 정통으로 맞은 야구공의 박살나는 듯한 타구음은 경쾌함을 넘어 공포를 자아냈고, 잠실야구장 한가운데를 정확히 절반으로 쪼갠 직선 홈런의 궤적은 흡사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모습을 연상시켰습니다.

▲ 1994년 LG에 입단해 시원한 직선 홈런으로 ‘캐넌 히터’의 별명을 얻은 김재현
장종훈의 빼어난 타격 기술은 다른 선수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이후 데뷔한 OB 임형석과 LG 김재현도 잠실야구장을 직선으로 가르는 홈런을 자주 터뜨리며 팬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작년 한국시리즈에서 SK의 우승을 견인하고 은퇴한 김재현이 만일 관중석에 꽂히는 직선 홈런이 아닌 포물선의 궤적을 그리는 홈런을 터뜨리는 타자였다면 ‘캐넌 히터’라는 시원스런 별명이 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998년 외국인 선수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면서부터 국내 선수들도 그들의 타격 기술을 습득하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본받기 시작했습니다. 근육을 키우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상대 투수의 한복판 실투나 몸쪽 공을 공략해 잡아당겨 담장을 넘기는 홈런에만 머물지 않고 바깥쪽 공을 밀어 쳐 홈런을 터뜨리는 타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2003년 56개의 홈런으로 아시아 신기록을 수립한 삼성 이승엽은, 홈런을 내주지 않기 위해 바깥쪽 공으로 승부했던 상대 투수의 투구를 밀어 쳐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종종 터뜨려 신기록 수립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 진출한 이승엽이 2008년 이후 부진에 빠진 것은 손가락 부상 등 여러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지만, 이전까지 지니고 있었던 바깥쪽 공을 밀어 쳐 홈런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잊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최근 한국 프로야구에는 ‘뜬금포’라는 신조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사용된 이 단어는 ‘기대하지 않은 선수에 의해 뜬금없이 터진 홈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없다’는 부정적 의미의 서술어가 생략된 채 정반대의 의미로 압축되어 ‘뜬금포’로 통용되는 것을 보면, 문법적 의미에서 오용이라 할 수 있지만 그만큼 일반화된 셈입니다. 최근에는 장타 능력을 보유한 중심 타자 이외에 하위 타순의 8번, 9번 타자들도 결정적인 순간 ‘뜬금포’를 터뜨리며 승부의 흐름을 한 순간에 바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투를 놓치지 않고 홈런으로 연결시키는 능력도 일부 거포들만 지녔던 과거와 달리 거의 모든 타자들이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는 체계적인 웨이트 트레이닝과 타격 기술의 발전이 프로야구 전반에 보급되어 리그 수준이 향상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1점차를 지키기 위해 등판해 세이브를 올리기 더욱 어려워져 마무리 투수가 롱런하기 어려운 시대에 접어들었고 예측불허의 접전과 역전 명승부가 속출하며 프로야구 관중의 폭발적인 증가세로 이어졌습니다.

올해로 출범 30주년을 맞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야구의 꽃’ 홈런은 포물선 홈런에서 직선 홈런을 거쳐 밀어치는 홈런에서 뜬금포로 변천하며 팬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리그의 수준과 선수들의 체격 및 기술이 꾸준히 향상되는 추세에서 과연 어떤 선수가 혜성처럼 나타나 홈런의 새 지평을 열어 팬들을 열광시킬지 주목됩니다.


야구 평론가. 블로그 http://tomino.egloos.com/를 운영하고 있다. MBC 청룡의 푸른 유니폼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적시타와 진루타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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