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하지 않으실 분들도 많겠지만 제게는 <이끼>가 꽤 만족스러웠던 영화로 남았습니다. 저 역시도 원작의 팬이라 영화화가 결정되면서 강우석 감독께 메가폰이 주어졌다고 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당시 리뷰에서 말했듯이, 원작의 복잡미묘한 내러티브와 캐릭터가 강우석 감독의 손을 거치면 지극히 단순하게 변질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리고 역시 이러한 우려가 상당부분 맞아떨어져서 영화에서는 원작이 가진 고유의 색채가 한결 옅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끼>를 만족스럽다고 한 이유는, 원작의 완벽한 구현에는 실패했을지라도 상업영화로의 변신으로는 합격점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더군다나 영화에서는 강우석 감독께 기대할 수 있었던 것 이상, 아니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면모를 보았습니다. 여전히 단순명료하고 우악스럽지만 본질을 크게 훼손하지 않은 선에서 적당히 마무리한 것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칭찬마저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만큼 <이끼>는 강우석 감독의 필모에서 적잖이 이질적인 영화였습니다. 강우석 감독의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글러브>를 기대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글러브>의 주인공 김상남은 한때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간판스타였습니다. 그런 그도 하세월을 감내하지 못하고 골칫덩이로 전락한 지 오래, 또 다시 사고를 치면서 징계위원회에 회부됩니다. 다행히 위원장이 과거의 은사라 제명을 면하는 대신에 시골 학교로 가서 야구코치로 봉사할 것을 명받습니다. 이 학교의 야구부는 다름 아닌 청각장애인으로 구성된 팀입니다. 가뜩이나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상남에게 청각장애인의 야구는 가당치도 않은 짓에 불과해 콧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더욱이 봉황기에 참가해 1승을 거두는 것이 목표란 얘기에 불성실한 자세로 일관하는데...

여기까지만 읽으셔도 이후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눈에 훤하시죠? 과거의 영광에서 현재의 나락으로 떨어진 주인공, 그가 어떤 계기로 인해 남에게 못 주고 있던 개버릇을 고치는데, 그 계기란 건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대상과의 만남입니다. 그것으로 주인공은 자신의 과오를 깨달으며 잊고 있었던 지난날의 열정을 되찾습니다. 아울러 주인공을 위해 희생하고 있었으나 이를 알고도 미처 감사의 인사 한번 전하지 못했던 친구와도 진심을 나눕니다. 그 결과, 다시 한번 열정을 불사르며 보잘것없는 이들이라 여겼던 선수들의 멘토가 되는 것에 열과 성을 다해 임합니다.

이처럼 <글러브>의 대략적인 전개는 전부라곤 할 수 없어도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의 조합입니다. 가까운 예로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보여줬던 <레슬러, 크레이지 하트>가 있고 <라디오 스타>도 언뜻 엿보입니다. 장애인 학교에서 올바른 교육관을 호소하는 것은 <죽은 시인의 사회>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이제는 퇴물로 전락한 야구선수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야구영화의 고전 중 하나인 <19번째 남자>나 <메이저 리그>의 환영도 아른거립니다. 딱 이 정도로 <글러브>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소재를 가진 영화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감동을 뽑아내는 데 그만큼 효과적이라는 의미니, 관건은 연출인데...

<글러브>에서 상남을 일깨우는 대상은 봉사활동차 들린 학교의 야구선수들입니다. 학창시절의 노력과 열정은 잊고 어느새 현실에 안주했던 그가 이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습니다. 여기까진 정말 뻔한 흐름이라 <글러브>는 또 하나의 설정을 가미했습니다. 바로 그 선수들이 타인과 다른 신체조건을 가졌으나 야구에 순수한 열정을 가진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꽤 영리한 변주지만, 동시에 양날의 검으로 작용할 수 있는 시한폭탄이기도 합니다. 으레 장애인이 등장하는 영화라면 폭풍감동이 휘몰아치는 뻔한 결말이 눈에 보이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것까진 괜찮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진부하다는 것은 그만큼 효과적임을 의미하는 것이니 활용하기에 따라, 즉 연출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입니다. 단언하건대 제가 만약 <이끼>를 보지 않았다면, 그래서 <글러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강우석 감독의 스타일을 감안하면 이 영화가 어떻게 표현될지 굳이 안 봐도 풀 HD급 티비처럼 선명하게 예상할 수 있고, 그 예상이 빗나갈 확률은 극히 적습니다. 다만 <이끼>가 있었기에 조금은 진일보하고 달라진 연출에 한번 기대를 해봤습니다만... 결과적으로 <글러브>는 기대에 부응하는 만족보다는 실망과 아쉬움이 더 큰 영화였습니다.

<글러브>에서는 더는 보고 싶지 않았던 강우석 감독의 단점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소재부터 신파를 요구하더니 연출마저 -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 노골적이고 진부하며 상투적입니다. 이 중에서도 제발 피해줬으면 하는 것이 노골적이고도 직접적인 표현인데, <글러브>는 이미 충분히 그러한 소재임에도 재차 거리낌없는 연출을 일삼습니다. 여전히 강우석 감독은 절제의 미덕을 외면하시며 관객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투박한 연출과 편집도 이어지고 있어 세련미라고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시간에 쫓긴 탓인지 초반엔 흐름이 매끄럽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러브>에 세 개 반의 별점을 준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야구하는 청각장애인이라는 소재가 가진 힘이 상상 이상으로 큽니다. 앞서 불만과 아쉬움을 토로한 저조차도 간혹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건 시나리오의 공이 큰 부분인데,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약자로서의 위치나 부당한 대우가 극에 잘 스며들었습니다. 특히 군산상고와의 야구경기 중에 이것을 묘사한 대목이나 학교 관계자들마저 장애인이 야구를 한다는 것에 불평등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아이러니가 꽤 인상적이고 독특합니다.

둘째, 실망스럽긴 했지만 적어도 예전과 비교하면 강우석 감독의 연출도 나아진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분명 <글러브>에는 노골적인 연출이 빚은 과도한 신파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작들에서 보여줬던 강제적 혹은 주입식의 훈계 따위가 없다는 것은 천만 다행입니다. 실망과 함께 아쉽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인데, 조금만 더 자제력을 갖췄더라면 <글러브>는 지금보다 훨씬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소재가 가진 힘을 이용해 정방향으로 가속시킬 것이 아니라 역방향으로 상쇄하면서도 끌어안을 수 있는 연출이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글러브>에서 가장 감동적인 건 배우들의 연기입니다. 정재영, 유선, 강신일 등의 연기파 배우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청각장애인으로 출연한 젊은 배우들은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아마 김혜성이 없었다면 철썩같이 실제로 청각장애인인 사람들을 배우로 고용한 것이라고 믿었을 겁니다. (제가 아는 배우가 김혜성 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다들 비장애인이더군요. 여담이지만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정일우가 부각되는 바람에 김혜성이 다소 묻혔는데, 이 친구의 연기력은 칭찬이 아깝지 않습니다. <폭력서클>에서도 제법 맘에 들었는데 이번 영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각설하고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글러브>는 평균점 이상은 줄 수 없는 영화입니다. <이끼>로 강우석 감독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거기에 기대했다가 <글러브>에서 다시 한번 실망했습니다. 이를테면 100미터 달리기에서 80미터까지 달린 선수가 갑자기 역주행을 하여 50미터로 돌아온 꼴입니다.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건, 아직은 절반의 지점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이 50미터에 담긴 내용물이 영화의 흥행성이라 이번에도 웬만큼 대중을 만족시킬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나머지 50미터도 잘 채워서 보다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어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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