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KBS 이사회(이사장 김상근)가 이사의 직무상 의무와 회의질서유지 등의 조항을 담은 이사회 규정안을 마련하자 야권 추천 이사들이 "소수 이사들의 목소리를 막는 규정"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KBS 이사회 다수의 이사들은 이번 운영규정 조항들이 이사회 파행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규정이자, 타 공공기관이나 해외 공영방송 운영규정 내용 중에서도 최소한의 내용들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동안 규정되지 않은 이사의 직무를 명확하게 규정해 KBS 이사의 책임성과 투명성을 강화한 운영규정이라는 것이다.

(왼쪽부터)천영식, 서재석, 황우섭 KBS 이사는 5일 서울 KBS 본관 시청자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소수이사들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KBS 이사회운영규정을 철회하라"고 주장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5일 야권 추천으로 임명된 서재석, 천영식, 황우섭 이사는 KBS 본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달 31일 의결된 KBS이사회 운영규정 개정안을 비판했다. 이사회 의장의 퇴장명령 권한, 비공개 회의 내용에 대한 비밀유지, 안건에 대한 보조동의안 제출 보장 등의 새 조항들이 소수 이사의 발언권을 제한하는 조항이라는 주장이다. 세 이사는 회견 직후 방송통신위원회에 이번 운영규정에 대한 유권해석을 요청한 상태다. 조선일보, 문화일보, 연합뉴스 등의 매체가 세 이사의 주장을 전했다.

국회 과방위 소속 한국당 의원들은 소수 이사들의 입장표명에 KBS 이사회 비판에 나섰다. 김성태 한국당 과방위 간사는 의장의 퇴장명령권과 관련해 "마음에 안들거나, 반대의견을 피력하면 쫓아내겠다는 뜻"이라며 비판했고, 박대출 한국당 과방위원은 "KBS 이사회가 독재의 유혹에 빠졌나"라며 여권 추천 이사들의 전원 사퇴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이사회 운영규정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왜곡한 주장이라는 지적이 개정안을 의결한 다수 이사들로부터 나온다.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회의에 관한 일반규칙을 토대로 일반기업, 타 공공기관이나 해외 공영방송 등에 규정되어 있는 최고 의결기구의 운영규정 중에서도 최소한의 규정들로 운영규정을 개정했다는 설명이다.

야권 추천 이사들은 이사의 비밀유지조항과 관련해 "비공개회의 내용을 평생토록 발설하지 말라고 규정한 조항"이라고 주장했다. 방송법에 따르면 KBS 이사회는 공개가 원칙이다. 하지만 명예훼손 소지가 있거나 개인정보 또는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사항들에 관한 논의는 비공개로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처럼 방송법에 따라 비공개하기로 결정한 회의의 내용을 특정 이사가 마음대로 공개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으며 공개한 이사 개인은 물론 KBS의 법적 책임 문제까지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다수 이사들의 지적이다.

실제로 영국 공영방송 BBC의 이사회 규정에 따르면 BBC 이사는 업무 중 취득한 모든 정보를 비밀로 유지해야 하고, BBC의 사전 서면 동의가 없는 한 임기 중은 물론 퇴임 후에도 공개할 수 없다. 일본 공영방송 NHK의 경영위원회 위원 복무 준칙 제6조에도 '경영위원회 위원은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하여서는 안 된다. 그 직을 물러난 후에도 같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의장의 퇴장명령 조항에 관해 야권 이사들은 "국회법도 상임위 등에서 위원장의 퇴장 명령은 방청객을 상대로 할 뿐 회의 참석자를 퇴장시킬 수는 없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공영방송의 이사를 '정치인'에 빗댄 부적절한 비유이며, 사실과도 다르다.

국회법 제145조(회의의 질서 유지)에 따르면 국회의원이 본회의나 상임위 회의장에서 회의 질서를 어지럽힐 경우 의장이나 상임위원장은 경고나 제지를 할 수 있고, 제지에 따르지 않을 시 의장은 해당 의원의 발언을 금지시키거나 퇴장시킬 수 있다.

새로 마련된 KBS 이사회 운영규정 관련 조항은 '이사가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발언이나 행위를 할 경우 의장은 그 사실을 지적하여 경고할 수 있고, 그러한 발언이나 행위를 계속할 경우 중지를 명할 수 있다. 의장이 중지를 명한 후에도 발언이나 행위를 계속하여 원만한 의사 진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경우 의장은 그 이유를 밝히고 해당 이사의 퇴장을 명할 수 있다'이다.

해당 조항의 필요성은 비교적 최근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달 KBS 임시이사회에서 야권 추천 황우섭 이사는 '시사기획 창-태양광 사업 복마전'편 논란을 긴급 안건으로 상정해 이미 상정된 안건을 제치고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사장 제지에도 불구하고 세 차례 이사장에게 다가가 손으로 책상을 거칠게 내려치는 등의 위협적 행위를 했다. 이에 이사회 사무국장이 물리적 충돌을 막기 위해 이사장을 보호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사회가 이미 2주 전 양승동 KBS 사장으로부터 관련 보고를 받았고 그 후에 새로 제기된 쟁점이 없던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신설된 '보조동의안' 조항이 이사회 논의를 무산시킬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다수 이사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1인 이상의 이사는 상정된 안건에 대해 내용의 수정, 별도 절차 회부, 심의 연기 또는 토론 종결을 요구하는 보조동의안을 제출할 수 있고 보조동의안을 먼저 처리한 다음 그 결과에 따라 원래 안건을 처리한다'는 조항으로 안건 심리과정에서 제기되는 보조동의안을 처리하는 논리적 순서를 정한 것에 불과하며, 오히려 이사 개인이 누구나 상정된 안건의 처리에 관해 다양한 추가 요구를 할 수 있게 해 야권 추천 이사들의 발언권을 강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조용환 이사(법무법인 지평 변호사)는 지난 8개월여 간 KBS 이사회 논의는 물론 경영진과 집행부서들의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8번의 수정 끝에 이사회 운영규정을 도출했다. 조 이사는 6일 미디어스와의 통화에서 "이사회가 쭉 파행을 겪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규칙이라도 만들면 정상적 운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공공기관 이사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와 보편적 회의 규칙에 따라 당연히 따라야 하는 절차를 최소한으로 집어넣은 것"이라고 개정 취지를 설명했다. "공영방송 이사회의 회의답게, 정상적으로 회의를 진행하자는 것"이 이번 개정의 취지라는 게 조 이사의 설명이다.

조 이사는 "사실 야당 추천 이사들의 역할은 잘만 하면 매우 소중하다고 본다. 그런 역할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도록 많은 염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언권을 보장하기 위해 오히려 배려를 많이 했다"며 "그런데 어떻게든 경영진을 정치적으로 공격하고 다른 이사들을 모욕하며 자신들 원하는 대로만 이사회를 진행하려고 하니 합리적 규칙을 만드는 데 반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강형철 이사(숙명여대 교수)는 "이번 개정은 KBS 이사의 책임성과 KBS의 투명성 제고를 위한 규정 정비 차원의 일"이라며 "선진 공영방송과 공공조직 이사회, 일반 회의체에 적용되는 것보다 최소한의 의무를 넣었기 때문에 미흡한 느낌도 든다"고 말했다.

이어 강 이사는 "그동안 이사들은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KBS 이사는 직원들 위에서 군림할 수 있고 경영진에게 민원을 넣을 수 있는, 간접적 영향력을 미칠 확률이 굉장히 높은 사실상 권력자"라며 "직원들은 직무가 전부 규정되어 있는데 왜 이사는 직무 규정이 안 되나. 스스로 자정하는, 투명성·책임성 강화 작업을 한 것이다. 지금 당장 편하자고 이걸 하겠나"라고 반문했다.

개정된 운영규정에는 KBS 이사의 ‘직무상 의무’ 조항이 신설됐다. 이에 따르면 KBS 이사는 취재·보도·제작·편성의 자율성 및 임직원의 인격과 명예를 존중해야 하고, KBS의 업무·인사·이권에 부당하게 개입하거나 부정한 청탁,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한 직위 이용 등을 해서는 안 된다.

세 야당 추천 이사들이 반대한 이사의 직무상 의무 규정에 대해 또 다른 야당 추천 이사인 김태일 이사(영남대 교수)는 세 이사와는 달리 제안된 규정이 추상적이라고 지적, 내용을 구체화해 실효성을 가질 수 있도록 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KBS 이사회는 '이사의 의무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별도의 규칙으로 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소수이사들이 운영규정에 반발하며 예로 든 '오늘밤 김제동' 등 개별 프로그램에 대한 논의의 경우, 운영규정 여부와 관계없이 방송법상 KBS의 독립성과 공공성을 보장하기 위해 설치된 이사회의 논의 권한은 제한적이다. 프로그램에 대한 논의는 주로 시청자위원회에서 이뤄진다.

지난해 12월 천영식 이사는 '오늘밤 김제동'의 김정은 위인맞이 환영단 단장 인터뷰를 이유로 이사회 안건 상정을 요구, 실제 안건이 상정됐다. 당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오늘밤 김제동'에 2014년 개악 논란이 일었던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조항을 처음 적용해 '의견진술'을 결정했으나, 심의 결과 '문제 없음'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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