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오피스 소식을 전하면서 말씀드렸지만, 니콜라스 케이지는 재정 파산에 이른 이후 다작에 임했습니다. 이 즈음에 찍은 영화가 대략 8편 정도이나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고 보기에는 인색한 결과를 내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완성도를 따져 봐도 <킥애스> 정도를 제외하면 실망스러운 작품이 많았습니다. 흡사 닥치는 대로 찍어서 빚을 청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마저 엿보일 정도였죠. 심정적으로 이해는 갑니다만 예전의 니콜라스 케이지를 떠올리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즌 오브 더 위치> 또한 그러한 작품들 중 하나에 그치고 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시즌 오브 더 위치>는 14세기의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칩니다. 십자군 원정에 가담한 주인공 베이먼은 '성전(聖戰)'이라는 미명하에 이슬람 국가들을 침략하여 닥치는 대로 짓밟았습니다. 그렇게 피를 보며 세월을 보내던 중에 그는 문득 살상에 환멸을 느껴 십자군에서 이탈합니다. 친구이자 동료인 펠슨과 함께 유랑을 시작한 베이먼은 한 마을에 도착하는데, 왠지 모를 암울한 기운으로 가득함을 알아차립니다. 설상가상 정체가 발각되어 추기경에게 끌려가는 베이먼과 펠슨. 이들에게 추기경은 막중한 임무를 부여합니다. 바로 흑사병을 퍼뜨린 원흉으로 지목된 마녀를 수도원으로 호송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하여 두 사람은 호송대를 조직하여 수도원으로 출발합니다.

십자군 원정과 마녀. <시즌 오브 더 위치>의 소재는 꽤 흥미롭습니다. 십자군 원정은 표면적인 명분과 달리 점차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로 침략을 일삼았고, 마냐사냥은 대중으로 하여금 집단광기에 사로잡히게 만들면서 하나의 효율적이고도 미개한 지배수단으로 악용됐을 뿐입니다. 둘 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신랄한 비판을 퍼부어도 될 만한 이야깃거리죠. 그러나 <시즌 오브 더 위치>는 어느 것 하나 만족할 만한 활용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도미닉 세나 감독이 자신의 입장을 단적으로 표명한 오프닝에서 예견된 바이기도 합니다. <시즌 오브 더 위치>는 현대의 3S 정책과 유사한 목적으로 행해지던 중세의 마녀사냥을 화두로 던집니다. 그렇게 정치기반을 굳건히 다지고자 종교를 악용해 부당하게 희생시킨 사람들을 비추는가 싶더니, 실은 부당한 게 아니라 진짜 마녀가 있었네?, 라는 것으로 오프닝이 끝납니다. 허탈하기 짝이 없던 대목이지만, 이를 통해 <시즌 오브 더 위치>는 전형적인 오락영화일 것임을 천명하고 나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뭐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해두죠. 어차피 오락영화니까.

하지만 <시즌 오브 더 위치>를 마지막까지 이끌고 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십자군 원정과 마녀사냥입니다. 베이먼은 십자군 원정에서 자신이 죽인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이것은 결국 그가 마녀의 호송에 뛰어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마녀로 지목된 소녀가 억울하게 죽는 일이 없도록 하려던 것이죠. 아울러 극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수시로 이를 상기시킵니다. <시즌 오브 더 위치>는 이처럼 꽤 종교적이고 진중한 소재를 갖다 쓰면서도 철저하게 오락성에 치중하는 선에서 그칩니다. 평론가들이 주로 비판하는 '할리우드의 영화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충실한 셈입니다.

평론가가 아닌 이상 이것까지도 감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시즌 오브 더 위치>는 얼굴에 "난 오락영화요"라고 써 붙였으니 그 면상을 직시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오락영화라면 오락영화로서의 기능, 즉 두 시간 내외의 가벼운 유희에 충실하면 그걸로 된 겁니다. 그 이상을 보여주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 이하라 해도 자신의 영역만 확실히 구축하면 나무랄 의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시즌 오브 더 위치>는 별다른 재미가 없습니다. 의미도 없고 재미마저 없으니, 영화가 짊어진 원죄에 대한 비판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시즌 오브 더 위치>는 전개가 빨라도 너무 빠릅니다. 베이먼은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가 회의를 느껴 이탈하고, 우여곡절 끝에 마을에 당도하며, 일순간에 정체가 탄로나 추기경에게 끌려갑니다. 추기경은 그에게 다시 한번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기를 요구하고, 신앙심이 옅어진 베이먼은 이를 거부하지만, 또 어찌저찌하여 호송에 가담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리하여 호송대를 조직하고, 길을 나섰다가 몇 번의 참변을 겪고, 끝내 수도원에 도착하지만, 계획했던 대로 일이 돌아길 리가 만무합니다. 자,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굳이 줄거리를 끊어서 나열한 이유가 뭘까요?

모르긴 몰라도 <시즌 오브 더 위치>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족히 2시간은 넘어야 제대로 된 틀을 갖출 분량입니다. 그런데 실제 러닝타임은 1시간 30분 남짓입니다. 이렇다 보니 형식적으로 필요한 이야기의 구색은 엉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드라마의 기본은 갈등이라고 했거늘 <시즌 오브 더 위치>는 시종일관 술술 잘도 풀리니 그 어떤 긴장이나 몰입을 할 수 없습니다. 마치 마라톤을 해야만 하는 경기에 출전해서 50미터만 달리고 기권한 듯한 모양새입니다. 엉성한 시나리오도 문제지만 연출도 이를 살리기는커녕 도리어 페이스가 말린 형국이라 완주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소재의 활용도는 또 어떻고요. 십자군 원정과 마녀사냥의 진의를 겨냥하지도 않았지만 극적 긴장감을 키운다는 면에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이 영화의 중심에 있어야 할 것은 베이먼이 호송하는 소녀가 진짜 마녀냐, 아니냐로 빚어지는 갈등입니다. 이것만 잘 살렸어도 웬만큼의 재미는 뽑아낼 수 있었겠지만 <시즌 오브 더 위치>는 관객에게 의혹의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초반부만 지나면 "혹시?"로 인한 추측이 아니라 "역시"에 가까운 확신을 심어줄 뿐이니 도통 흥미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영화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재미가 형성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덧) 크리스토퍼 리가 출연했습니다. 별로 어렵진 않지만 누구로 등장하는지 한번 맞춰보세요. 굳이 보신다면 말이죠.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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