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4-5년 전까지만 해도 서아시아 중동 축구의 맹주 하면 사우디아라비아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에 처음 진출한 뒤 2006년 독일월드컵까지 4회 연속 진출한데다 아시안컵에서도 중동팀 가운데 가장 많은 3회 우승 기록을 갖고 있는 팀이 바로 사우디였지요.

특히 한국이 2008년 11월, 사우디 리야드에서 열린 남아공월드컵 최종예선 3차전에서 2-0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을 만큼 사우디아라비아는 한국이 버겁게 느꼈던 상대였습니다. 2000년과 2005년 두 번에 걸쳐 국가대표팀 감독을 경질하게 만든(허정무, 조 본프레레)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고, 역대 전적에서도 4승 7무 5패로 열세에 놓여 사우디만 만나면 크게 힘을 못 썼던 한국 축구였습니다.

하지만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북한에 밀려 5회 연속 본선 진출에 실패하더니 2011 카타르 아시안컵에서는 시리아, 요르단에 져 2전 전패로 일찌감치 탈락하는 신세를 겪어야 했습니다. 우승후보로 꼽힌 사우디의 조기 탈락에 사우디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적으로도 충격에 휩싸였는데요. 또 다시 조급증이 도지면서 감독을 중도하차시키는 강수를 뒀음에도 충격 요법 효과를 얻지 못하고 전패를 당하며 고개를 숙이는 비운을 맛본 사우디가 됐습니다.

▲ 사우디 아라비아 축구가 환호하는 장면은 더 이상 보기 힘들어진 것인가
이번 아시안컵에서 나타난 사우디의 경기력은 '정말로' 기대 이하였습니다. 이번 대회를 통해 월드컵 본선에 오르지 못했던 한을 풀고 명예회복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정상급으로 알려진 선수들 개인의 경기력이나 전술 모두 이렇다 할 특색 있고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사우디 특유의 탄력적인 개인기, 스피드를 활용한 위협적인 공격력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허술한 수비는 한 수 아래로 평가받던 시리아, 요르단의 조직 축구에 힘없이 무너졌습니다. 공-수 모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지 않다보니 복병들에 잇달아 덜미를 잡혔고, 제대로 된 강점 하나 보여주지 못하며 탈락했습니다.

특히 첫 경기에서 패하자마자 주제 페세이루 감독을 경질하며 조급증을 드러낸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렇다 할 대안도 없이 무작정 '자르고' 보는 축구협회의 조급증은 결국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한 꼴로 이어졌습니다. 오랫동안 이어진 악순환이 또 한번 나타나고,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이어지면서 사우디는 역대 최악 수준의 아시안컵 조별 예선 탈락이라는 쓴잔을 맛봐야 했습니다. 이미 탈락이 결정된 상황에서 대행으로 부임한 알 조하르 감독의 거취도 불안한 상황이어서 과연 사상 첫 3전 전패라는 기억하기도 싫은 순간을 맞이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사우디의 탈락은 어떻게 보면 자만에서 빚어진 참사로 봐야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자국 리그의 발전을 위해 '오일 달러'를 앞세워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막았고, 이것이 사우디 축구의 정체를 가져다줬다는 것입니다. 선수의 능력을 끌어올리기보다는 자국 리그의 양적 성장에만 급급하다보니 반대로 세계 축구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했고, 경쟁력을 약화시키며 퇴보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중동의 중심 국가이고, 어떻게 하다보면 그래도 월드컵에 오르고 우승도 할 것이라며 이렇다 할 발전을 꾀하지 않은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강호로 꼽힌 사우디의 조기 탈락이 한국 축구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멀리, 넓게 들여다보면 그리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동-서아시아 모두 질적으로 고른 발전을 추구하며 경쟁력을 높여 나가려 했던 아시아 축구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물론 중동 축구가 침대 축구, 비매너 축구라는 오점을 남기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사우디는 나름대로의 개성 있는 축구로 1990년대 세계에 강한 인상을 남긴 바 있었고 1994년 미국월드컵 본선 때는 16강에도 진출했습니다. 그랬던 사우디에게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유 있는 몰락은 중동 축구 전반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게도 그리 달갑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2000년대 이후 계속 해서 아시아의 월드컵 본선 티켓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중동, 그리고 그 대표 국가인 사우디 아라비아가 '책임 있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는 자연스레 한국 축구의 입지가 줄어드는 계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중동의 맹주를 자처하던 사우디의 잇따른 몰락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 불똥이 튈 수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해서 사우디 아라비아 축구가 획기적인 변화를 이뤄낼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축구 뿐 아니라 중동의 대표 국가인 사우디 아라비아의 부진이 중동 전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경쟁력을 갖추고 힘 있는 축구로 부활하는 사우디 축구의 모습을 그래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한국 입장에서도 사우디 축구의 성장은 아시아 축구 경쟁 국가로서 더욱 경쟁력을 높이고, 진정한 아시아 최강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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