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온통 일본 이야기뿐이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여야 5당 대표를 예정된 시각을 훨씬 넘겨서까지 만나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심지어 저녁 시간을 비워놨으니 식사를 하면서 더 얘기를 하자고 했다고 한다. 황교안 대표가 “일정이 있다”며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 회담은 비로소 끝났다.

대통령이 여야 대표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추경예산안을 국회에서 시급히 통과시킬 방법을 논해달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정부는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에 대응하는 성격의 예산을 추경안에 포함해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애초 대통령과 여야 5당대표들의 회동 이후에 공동합의문을 발표하는 방안이 논의된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보수야당이 ‘합의’를 거부하면서 공동합의문은 공동발표문 정도로 축소됐다. ‘합의’의 내용이었어야 할 추경예산안의 6월 임시국회 내 처리는 정경두 국방부 장관 해임건의안 관련 논란에 따른 파행과 함께 물 건너 가는 분위기다.

보수야당의 요구는 추경예산안 처리 같은 게 아니라 ‘경제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보수언론 등이 일본의 수출 규제에 맞서려면 부품 소재의 국산화가 필요하다는 논리에 전면적인 규제완화가 필요하다고 맞선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대전환’까지는 모르겠지만 민주노총의 표현을 빌자면 정부 여당도 전진하는 시늉을 하다 역주행을 감행할 태세 정도는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지난 16일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는 당청 연석회의를 열고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했는데, 한겨레 보도에 의하면 이 자리에서 화학물질 관련 일부 규제완화가 검토됐다고 한다. 내년도 최저임금이 2.87% 인상에 그친 이유를 최저임금위 공익위원이 설명하는 자리에서도 일본의 수출 규제 영향 등이 언급됐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18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반도체 부문 연구개발 분야에 대해 주52시간제의 예외 적용을 검토하겠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이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 연장이나 선택근로제 확대 적용 등으로 해석되자 기획재정부가 부랴부랴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국민이 똘똘 뭉쳐 일본의 ‘경제 침략’을 이겨내자는 정부 여당의 슬로건이 대기업과 보수세력이 떡 본 김에 제사를 지내는 근거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정당대표 초청 대화'에서 여야 5당 대표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사람이면 응당 한국 편을 들고 볼 일이라는 논리의 파장은 언론 환경의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 청와대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일본판 기사 번역 문제를 직접적으로 문제삼은 게 그렇다. 청와대가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이들 신문의 번역이 일본 내 혐한 여론을 조장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중앙일보는 억울하다는 분위기지만 조선일보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문제가 없다고 말하긴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의 만행은 한국이 아닌 일본에 뿌리를 두고 있는 언론이기 때문에 벌어진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 원인은 ‘돈’과 ‘클릭 수’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일본인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제목으로 클릭 수를 늘려 경제적 이익을 취하자는 논리가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과 이에 따른 양심보다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한 결과라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자신들의 속물성에 대해 침묵하는 대신 내놓은 것은 참여정부 시절 민관공동위 판단에 대한 청와대의 설명의 반박과 1965년 이후 한일 양국 사이에 해결되지 않았던 쟁점을 역대 정부가 어떻게 다뤘는지를 자신들의 시각으로 해설한 칼럼의 지면 배치이다. ‘21세기 독립투사’들이 보기에 이것은 조선일보가 친일 신문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처럼 보이겠지만 이들이 완전히 틀린 얘기만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령 참여정부 시기 민관공동위 발표 내용을 보면 ‘가짜뉴스’라고 한 여당 인사의 반발과 달리 강제징용 피해 보상 요구가 일본이 제공한 경제협력자금 액수의 산정에 반영됐다고 해석한다는 표현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다만 같은 자료에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 역시도 분명하다. 강제징용 판결에서 대법원의 판단은 강제징용 피해가 “반인도적 불법 행위”에 포함된다는 것이지만, 참여정부 시기의 민관공동위는 이 수준에 이르는 적극적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 나름의 ‘현실적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일보는 역사적 문제에 대해 일본이 3번이나 사죄도 하고 할 만큼 했는데 한국 법원으로부터 시작된 파장을 정부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논조를 반복하고 있다. 적어도 일본 정부가 과거사에 대해 나름대로 사죄를 하고 법적 책임이 아닌 도의적 차원의 호의를 베풀려던 사례가 있는 건 사실이다.

조선일보가 말하지 않은 것은 일본의 태도가 그들이 처한 국내정치적 맥락에 맞추어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노 담화는 자민당이 정권을 잃기 직전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나왔다. 무라야마 담화의 주인공인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자민당과의 연립으로 우경화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호헌과 동북아의 평화를 중시한다는 사회당 출신 인사였다. 간 담화의 간 나오토 총리는 당시 민주당 소속이었다.

일본 정부가 과거 전쟁을 일으켰던 당사자로서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고 동북아 평화에 이바지 한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다면 식민지 피해국으로서 우리도 화해와 협력으로 나아가는 길을 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앞서 참여정부 시기의 민관공동위가 ‘현실적 판단’을 할 당시 아베 신조 총리의 정치적 스승뻘이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 이력이 있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취지의 고이즈미 담화를 내놨다. 그러나 적어도 최근까지 일본 정부가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것은 개헌을 통해 여느 국가들처럼 다시 군대를 가져 세계의 분쟁에 개입해 국익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은 아예 혐한을 하는데 반일이 대수냐”는 얘기를 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 반대이다. 일본과 같은 길에서 싸우겠다는 게 아니라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태도로 이 문제에 임해야 한다. 그것의 시작은 평범한 사람들 간의 국경을 넘는 양심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교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33명이 사망하고 36명이 부상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느꼈을 충격과 슬픔에 공감하며 위로를 보내는 일이 많이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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