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 인근 바다에서 9.0 규모의 큰 지진이 발생했다. 한 시간 못 미처 거대한 쓰나미가 일어났다. 해일은 미야기, 후쿠시마, 이와테 현 등 일본 동북지방 태평양 연안을 쓸어버렸다. 1만 5890명이 사망하고, 2589명이 행방불명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에서 방사능이 대량 유출됐다.

원광대 교학대학 학장의 권유로 예비교무들은 동일본대지진으로 어려움에 처한 일본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학생, 교직원을 비롯해 익산시민 한 분 한 분을 만나 10초 정도의 짧은 동영상을 촬영해서 유튜브에 올리는 방식이다.

쉽게 눈에 띄도록 학생회관 앞 광장에 천막을 여러 동 설치했다. 대형 텔레비전으로 관련 영상자료를 반복 상영했다. 두 명의 기자를 둬서 한 명은 활동을 언론사에 알리는 역할을 맡았고 다른 한 명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했다. 향후에 백서를 만들 계획이었다.

풍물패 동남풍이 학교 구석구석 돌며 흥을 돋우면 뒤따르던 예비성직자들은 학생들의 동의를 구해 영상을 찍었다. 행사의 취지를 ‘5문 5답’으로 풀어서 사람들에게 배부했다. 조를 나눠서 단과대별로 찾아가게 했으며, 음악동아리는 익산역에서 지역주민들을 만났다.

바다 너머 재해피해자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하자는 의도였지만 일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부 학생들의 반일감정은 생각보다 강고했다. 일본이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원색적 발언을 토하기도 했다.

그래. 일제강점 35년간 다수의 조선인들은 더러운 취급받았다. 아들들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군에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었고, 딸들은 일본군 성노예가 되었다. 숱한 독립군들은 고문당하고 학살되었다. 이루 말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러나 재해로 가족을 잃은 이들과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은 나에게 욱일기 휘날리는 황국신민이 아니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그들을 과거사를 이유로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연재해 이면에 숨긴 인간의 탐욕과 환경파괴를 반성하고 이웃나라 주민들에게 형제애를 보여주는 일이 종교인으로서의 도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학교광장에서 모든 예비교역자들이 예복을 갖춰 입고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108배를 올리자는 아이디어는 대중의 반대로 무산됐다. 인류애를 담은 성명서만 간신히 채택됐다. 그만큼 일본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었다.

2019년 7월. 일본 아베신조 수상은 한국기업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요한 핵심소재 3가지를 일본기업으로부터 수입하기 어렵게 하는 수출 규제를 강화했다.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군대를 보유하려는 구상 아래 곧 치러질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하려는 아베 총리는 지지층을 결집하고자, 문재인 행정부의 ‘위안부 합의 파기’와 한국 사법부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양국 간의 신뢰를 훼손했다는 까닭을 들어 대한민국과 대립각을 세운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위정자들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위기를 조장하고 불안과 갈등을 부추겼다. ‘북풍’과 ‘지역주의’만 해도 그렇다. 아베의 경제제재 역시 같은 맥락이다. 권력욕에 눈멀어 퇴행적 민족주의를 부채질하는 아베와 그에 맞장구치는 한국의 정치인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한국과 일본의 시민이 힘을 모아야겠다. 나아가 그들이 민족감정을 자극하더라도 우리 개개인은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 예를 갖춘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

‘고요한 천둥소리’는 더 이상 깊은 산속 선사(禪師)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분노 앞에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는 시민, 그 깨어있는 시민들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섬광으로 빛날 때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한일 간에 깊게 드리운 어둠은 원래 없는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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