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강제징용 소송 판결에 반발하는 일본이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를 강화한 이후 양국 간의 민족주의적 대립구도가 강화되고 있다. 한국 네티즌들 사이에선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나 일본 여행 취소 선언 등이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런 때일수록 쟁점을 제대로 짚어보고 합리적 대응을 모색하려는 정치와 언론의 노력이 절실하다.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의 입장 차는 명확하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조치를 무역 외의 문제를 근거로 한 보복 조치로 규정하고 있다. 강제징용 판결에서 불거진 외교적 문제를 무역 보복으로 풀려는 것이며 이는 국제규범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베 신조 내각은 한국 정부의 이런 주장을 부정한다. 아베 신조 총리와 니스무라 야스토시 일본 관방부장관,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성 대신 등은 언론을 통해 연일 자신들의 조치가 WTO 규범 등을 위반한 게 아니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이들의 논리를 단순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강화는 보복이 아니라 안전보장을 위한 무역관리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한국에 대한 조치는 그동안의 우대조치를 2004년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뿐이므로 국제규범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특별히 한국을 ‘화이트국가’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사나 정치 문제가 아니라 신뢰가 훼손됐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정부는 일본의 이런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일본이 주장하는 ‘신뢰훼손’이란 결국 무역 등 경제 문제가 아니라 위안부 합의 파기와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라는 정치적 문제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반도체 소재를 군사적으로 활용 가능한 이중적 지위의 물자로 보는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번 조치는 이에 관한 각국의 제도 운용 규범 등을 규정한 바세나르 체제 기본지침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바세나르 체제 기본지침은 선량한 의도의 민간거래를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전략물자 제도를 운용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게 근거다. 또, 정부는 일본의 수출허가제도가 상품 수출에 대한 금지나 제한을 허용하지 않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11조에 위배되는 사례로 명시돼있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일본이 반도체 소재의 안보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국가 안보와 관련한 물자의 경우 수출을 제한할 수 있다고 규정한 GATT 21조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조항이 적용된 사례는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침공했을 당시 우크라이나의 물자 이동을 제한한 것이 유일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준전시상황에 해당하는 상황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성격의 조항이라는 것이다.

4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서울겨레하나 관계자들이 일본 경제보복 조치 항의 및 강제징용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WTO 체제에 대한 논의를 벗어나더라도 일본의 태도는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베 신조 총리 등은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한국 정부가 신뢰를 훼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강제징용 피해에 대해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한국 대법원 판결은 청구권협정으로 소멸된 것은 국가 간 외교보호권이고 개인청구권은 자체는 유효하다는 판단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점은 일본 정부도 과거 여러차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인정했다. 재판 과정에서 일본 기업 측은 배상 의사를 밝히기도 했는데 일본 정부가 강경한 입장을 밝히면서 태도가 달라졌다. 즉, 이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일본 정부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대응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 첫째는 자유무역의 가치를 수호하고자 하는 국제사회의 주류 논리에 호소하는 것이다. 정부가 일본의 조치를 ‘보복’으로 규정하면서 WTO 제소를 검토하는 것은 이 맥락이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철강 제품에 대한 관세 부과를 고려할 때에도 유사한 스탠스를 취하면서 중국 및 유럽 등과 공동전선을 형성하려는 시도를 한 바 있다.

둘째는 WTO 제소 등의 국제법적 절차에 의한 해결에 상당한 기간이 소요된다는 점을 감안해 국내 산업을 보호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최근 반도체 소재의 수입다변화나 국산화에 상당한 규모의 재정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다만 이는 장기적 대책은 될 수 있어도 당장의 피해를 경감시키는 것에는 제한적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우려되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의 탈출구를 실효적 방식으로 모색하기 위해서 기업에 전반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정부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전형적인 중도화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정부는 3일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지난해 12월 전망치보다 0.2%포인트 햐향해 2.4~2.5%로 제시했다. 이와 함께 발표된 2019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는 기업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투자세액공제율 상향 등의 감세를 핵심으로 하는 정책 패키지가 포함됐다.

보수세력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당하고 있는 최저임금 인상의 경우 정부 여당 내에서 동결론이 나온지 오래다. 최저임금위원회 사용자위원들은 아예 올해에 비해 4.2% 삭감한 8000원을 내년도 최저임금안으로 제시했다. 근로자위원들은 19.8%를 인상한 1만원을 제시하고 있다. 양측의 간극과 최근 정부 여당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내년도 최저임금은 인상이 결정되더라도 물가상승률과 비슷한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상황에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인한 위기론까지 겹쳐지면 정부의 중도화 드라이브는 속도를 더해 갈 가능성이 있다. 특히 보수언론을 비롯한 보수세력이 이번 사태를 정부의 외교실패로 규정하고 있는 상황에선 경제적 측면에서의 대응으로 이를 만회하려는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얘기다.

애초에 자유무역의 이념은 자본과 기업을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의 산물로 오늘날에는 거부할 수 없는 국제질서의 일부가 돼 있다. 일본이나 미국의 보호무역으로의 후퇴(?)와 이를 막는 자유무역의 수호자로서 유럽, 중국이라는 개념은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모두 기득권 논리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한국 대 일본이라는 민족주의적 갈등은 이런 대립 구도의 또 다른 변주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가 ‘부메랑’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일본 기업의 손해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피해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갈등의 구도를 재설정하는 대안적 정치의 역할이 절실하다. 애초에 강제징용 피해자들도 노동자로서 착취당한 것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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