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국회 정상화의 공은 여당으로 넘어왔다. 지난주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국회를 정상화 하기로 합의하면서 정치개혁특위와 사법개혁특위의 위원장을 의석수 순으로 나누기로 했기 때문이다. 결국 여당이 두 특위 중 어디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후 정국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게 된 셈이다.

애초에는 더불어민주당이 결국 사법개혁특위를 선택하게 될 거라는 전망이 다수였다. 자유한국당은 검찰개혁과 선거제도 개혁에 모두 반대하기 때문에 이들이 위원장을 맡게 되는 특위의 경우 시간만 끌다가 다뤄야 할 법안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여당 입장에선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공수처 설치와 검경수사권 조정은 정권의 숙원인데 반해 선거법 개정의 경우는 여당이 진실로 절실하게 원하는 사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자유한국당 소속의 위원장이 있는 특위의 경우 패스트트랙 지정 법안의 상임위 논의 기간 180일을 다 채우게 될 가능성이 크다. 마찬가지로 자유한국당 의원이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는 법사위에서도 90일을 모두 채우는 게 기정 사실이다. 본회의 부의기간 60일까지 고려하면 패스트트랙 지정 법안은 내년 3월 말에나 본회의 처리가 가능해진다.

이미 본격적인 선거 준비가 한창인 상황인 이 시기에 선거법 개정안을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여당이 정개특위원장을 자유한국당에 넘겨준다는 것은 선거제도 개혁을 포기하는 결정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일이 현실이 돼도 여당은 국회 정상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며 자유한국당에 책임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이 여당의 책임을 촉구하고 나서면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특히 정의당이 정개특위원장이던 심상정 의원이 사실상 ‘해고’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면서 여당이 선거법 개정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중대 결단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담이다. 더불어민주당이 단독으로 원내 과반을 점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범여권의 공조가 깨지면 앞으로 개혁입법의 관철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여당 내에서도 사개특위가 아닌 정개특위를 선택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한다.

물론 여당이 정개특위를 지키더라도 결론적으로 패스트트랙 지정 법안의 처리는 같은 날에 하도록 합의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선거제도 개혁은 쉽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자유한국당이 사법개혁특위에서 다루는 공수처 설치와 검경수사권조정 법안의 처리를 지연시키는 것만으로도 패스트트랙 지정 법안 전체의 본회의 표결 시점을 좌우할 수 있도록 돼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까지 고려할 때 패스트트랙 지정 법안이 내년 3월 말이 돼야 본회의에서 처리 가능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회의론도 있다.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2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어쨌든 여당이 개혁 법안을 마치 양자택일하듯 해야 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든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물론 자유한국당이 국회 정상화에 전혀 협조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결단이었다는 항변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굳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됐다면 최대한 개혁을 포기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옳다. 무엇을 먼저 포기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애초에 개혁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것 아니냐는 인식에 근거를 제공하는 일이 될 뿐이다. 선거제도 개혁의 핵심축인 정개특위원장을 최소한 여당이 맡고 이후 상황에서 ‘패스트트랙 연대’ 등의 다양한 지렛대를 활용해 자유한국당을 압박하는 시도를 계속해야 한다.

그런데 논의 구도가 이런 상황이 된 본질적 이유를 볼 필요도 있다. 원내에서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 가장 분명한 목소리를 내면서 의지를 갖고 추진해온 세력은 누가 뭐래도 정의당이다. 이는 단지 정치세력의 이해득실에 따른 문제가 아니다. 진보정당들은 과거에도 선거제도 개혁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진보정치의 상징적 인물인 심상정 의원이 정개특위원장을 맡는 성과를 낸 것에도 이런 의미가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국회 내에서의 이러한 성과가 다수파 정당의 사정에 따라 너무나도 쉽게 박탈당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해주는 계기가 됐다. 정의당은 그동안 원내진보정당으로서 개혁적 정권과의 공동행보를 통해 실리를 추구하는 정치에 집중해왔는데 이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사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보정치 스스로의 독자적인 대중기반 확보가 절실하다. 개혁적 정권과의 상호 호혜적인 관계 설정은 이런 기반 위에서 될 때에야 실효적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의당이 ‘중대 결단’을 언급하는 대상이 선거법 개정에 한정되고 있다는 현실은 진보정치 스스로가 뼈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면 공공부문의 파업은 원내 정치에서 어떤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이것에는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약속한 정권이 자회사 설립을 통한 간접고용으로 생색을 내는 것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는 상황이 원인이다. 과거 정권에선 야당과 노동계, 시민사회단체가 이런 방식의 해법을 ‘중규직’이라고 부른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논의가 원내정치의 주요 의제가 되는 상황은 지난 2년간 없었다. 지금도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게 전부다. 오히려 노동정책에 있어서는 어떻게 하면 잘 후퇴할 것인지를 논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진보정치가 반드시 언제나 사생결단의 자세로 개혁을 자처하는 정권을 대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진보정치가 자기 역할을 찾으려면 적어도 정권을 보다 왼쪽에서 지속적으로 잡아 당기면서 개혁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국회 밖의 현안을 통해 나오는 노동자와 서민의 목소리를 원내에서 대변하겠다는 명확한 목표의식을 갖고 대안적 정치를 만들어 가지 않으면 결국 사상누각이 될 뿐이다. 누군가에겐 새삼스러운 얘기일 수 있겠지만 원내의 진보정치가 이런 교훈을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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